회색빛 도시
라트비아와 한국은 직항이 개설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헬싱키를 거쳐 라트비아에 도착했다.
라트비아 공항에 처음 내린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분명 내가 도착한 공항이 국제공항 맞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분명 international airport인데...
가끔 대학교 근처에서 MT를 갈 때나 이용했던 서울의 상봉터미널보다 낙후되고 작은 공항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쭈뼛쭈뼛 거리며 공항 밖을 나가니, 같이 일하게 될 부장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 첫인상이 어때?
하는 질문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뗬다. 차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색하게 웃는 나를 보면서 대구 출신 부장님은 또 한마디를 던졌다.
- 정 붙이고 적응해야 한다.
부장님의 차를 타고 일주일 간 내가 머무르게 될 호텔로 향하며, 나는 열심히 내가 살게 될 도시를 구경했다.
회색 빛의 도시였다.
내가 그동안 교환학생을 하고 인턴을 하고, 또 여행을 다녔던 다른 유럽 나라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유럽이라기보다는 러시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호텔에 도착한 후, 부장님이 라트비아에는 한국인 교민이 딱 2명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조금 있다가 올 회사 대리라고 했다. 라트비아 사람과 결혼해서 지내는 분인데, 오늘 나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러 오시겠다고.
짐을 대충 풀어놓고 바로 식사 약속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대리님이라는 분은 어린 아기를 데리고 나오셨다. 웃는 게 참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식사를 하며 내가 지낼 곳에 대한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나눴다.
회사에는 법인장님, 관리담당님, 그리고 영업 부장님 이렇게 3분의 주재원이 있고
다른 한국인 직원은 교민이라는 여자 대리님 그리고 나 이렇게 2명이라는 사실.
- 혹시 제 또래의 한국인들은 여기 없나요?
하고 물으니, 대사관 직원 한 명 정도라고 했다.
다른 회사에 다니는 한국인들도 3-4명 정도 있는데 모두 30대 중후반이고
나머지는 주재원 가족분들이라 나와 나이가 맞지 않을 것이라 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나는 슬금슬금 내가 혼자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지금 나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회사 대리님이자 나보다 10살이 넘게 많은 애 엄마 이신 분이 이 곳에서 내가 만나게 될 한국인 중 가장 나이 차이가 적은 한국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앞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로컬 맥주 2병을 사서 방으로 들어갔다.
맥주를 마시면서 10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후, 내가 마주하게 된 이 상황에 대해 곱씹어 봤다.
세상에.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기만 했을 뿐인데. 내 상황이 이렇게 바뀌었다니.
대도시 서울에서,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지내다가
마치 80년대 서울 같은 이 낙후된 회색 도시에, 한국인이라고는 젊어야 30대 후반, 나머지는 4,50대뿐인 이 곳에 24살인 내가 뚝 떨어지게 되다니.
내가 어쩌다가 이런 선택을 했지? 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답답해졌다. 도저히 여기서 잘 지낼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며 나는 이 곳에서 딱 1년만 버티고 돌아가서 다시 취업을 하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