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상선 저하와 갑상선 항진
항상 평균치를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안다.
갑상선 호르몬 수치가 낮으면 저하, 높으면 항진이라고 하며 이를 통칭하여 갑상선 기능 이상이라고 부른다.
나는 환자들에게 설명할 때 갑상선을 보일러에 비유한다.
갑상선 저하는 보일러가 고장 나서 꺼진 것처럼 춥고 피곤하고, 살도 찌고 피부도 푸석푸석 해 질 수 있다.
갑상선 항진은 보일러를 세게 틀어놓은 것처럼 덥고 두근거리고, 살도 빠지고 안구가 돌출되기도 한다.
저하증에서는 갑상선 호르몬을 보충할 수 있고, 항진증에서는 항갑상선제를 복용하거나 방사성 요오드 치료를 받거나 수술을 하기도 한다.
내가 내분비내과를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평균치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다.
보통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조회할 때, 평균치 내에 있는 항목은 검은색, 평균보다 높은 항목은 빨간색, 평균보다 낮은 항목은 파란색으로 표기된다.
나는 모두 검은색인 검사 결과가 참 좋았다.
빨갛고 파란 항목들이 뒤죽박죽일 때면
'이런. 어떻게 이것들을 다 제자리에 돌려놓지.'
하고 뇌가 풀가동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내과의사가 이런 특성이 있지만, 내분비내과 의사가 가장 심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온통 빨갛고 파랗던 검사 결과가 검은색으로 변했을 때의 기쁨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었다.
물론, 가장 좋은 의사는 높아야 될 때 높아진 수치와 낮아야 할 때 낮아진 수치를 이해하고 지켜볼 줄도 아는 의사다.
이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의미 없이 나열해 보려고 한다.
출근 후 아침에 마시는 뜨거운 라테,
오전 업무를 다 쳐내고 난 직후의 안도감,
진료실 밖으로 비가 내리는 소리,
토요일 퇴근 직전의 벽시계,
퇴근길 라디오에서 나오는 평소 좋아하던 음악,
퇴근 후 깡충깡충 뛰는 딸아이의 모습,
잠든 아기와 남편의 모습.
떠올리기만 해도 세로토닌이 분비되는 기분이다.
업무상 한 번씩 대화할 일이 있는 지인이 있는데, 대화를 하고 나면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럴 때면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지, 대화했던 사실을 잊어버리자, 아니야 다음번에는 이렇게 대화를 해야겠다 등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 번씩 마주칠 일이 있는 사람이니까 싫어하지 말아야지,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은 부정적이고 귀찮은 감정이니까 드러내지 말아야지 하고 꽁꽁 싸매 놓았던 봉인이 풀린 것이다.
'아,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구나.'
하고 인정만 했을 뿐인데 마음이 시원해졌다.
남을 싫어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팍팍 표현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것을 인정조차 하기 싫어서 마음을 뭉개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다른 사람 불편하게 하는 게 싫다지만, 그렇다고 본인 마음을 이렇게 무시해도 될 일인가.
안되지, 안될 일이다.
우리 언니는 어릴 때부터 싫어하는 게 많아서
'너는 그렇게 불만이 많아서 어떻게 사니'
하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변호사가 되고 나니 이 미묘한 불편함을 객관화, 문서화하는 능력이 빛을 발했다.
언니 말에 의하면 주변에 자기보다 더 한(?) 변호사도 많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언니가 싫어하는 게 많고 내가 싫어하는 게 적은 게 아니었다.
언니는 싫은 것을 싫다고 느끼고 표현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싫은 것을 싫다고 느끼지 못하고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퇴근 후 남편에게
"여보. 나 그 사람 싫어하나 봐."
라고 했더니 남편은
"어. 몰랐어?
난 알고 있었는데."
라고 대답한다.
모두가 다 아는 내 감정을 나만 몰랐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좇을 권리, 내가 싫어하는 것을 피할 권리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모니터의 검은색 글씨들을 보며 미소 짓고,
070으로 걸려온 스팸전화는 받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