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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니 Jul 28. 2023

놀이매트 위의 콜라주

나에게 아름다운 것들


  어제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미술관에 다녀왔다. 나는 미술관을 즐겨 다니거나, 유명한 공연을 찾아다니며 관람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그런 경험이 적은 탓일 것이다. 그마저도 그런 기회를 전혀 가질 수 없었던 부모님께서 자식들은 다르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했기에 가질 수 있는 경험이었다.


  나도 내 아이들에게 어릴 때 내가 가졌던 것보다는 더 많은 경험과 기회를 주고자 미술관과 박물관, 공연 등에 데려가려고 노력한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와 가요 듣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어도 심오한 예술 세계를 만나면 나는 까막눈이 된 것처럼 그 작품들을 어떻게 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제도 그림들 옆에 쓰여 있는 해설들을 열심히 읽어주고, 아이들에게 어떤 그림 같냐고 물어보기도 하며 내 나름의 방법으로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려고 노력했다.


나름대로 관람을 즐기는 중인 아이들


  이름을 들어본 굵직굵직한 작가들의 작품을 볼 때는 더 관심이 갔지만 아이들을 챙기느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전시관 하나를 둘러보고 나자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다’, ‘목이 마르다’하며 전시관을 떠나고 싶어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최대한 흥미로워 보이는 것을 얘기해 가며 작품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도 잠시 뒤 끝이 났다.

  막내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벽 쪽에 잠깐 쪼그려 앉혀놓았는데, 어느새 아이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신발과 양말까지 벗어놓고서 자기 발가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시관의 작품들을 볼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유심히 바라보는 그 눈빛이란.. 역시 인간의 몸이 가장 신비로운 것이지.


  다른 관람객들에게 더 폐를 끼치기 전에 얼른 아이가 벗어놓은 양말과 신발을 주워 들고, 아이를 번쩍 들어서 전시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남편과 시부모님께서 관람을 마칠 때까지 나와 아이들은 의자가 있는 전시관 옆 쪽에 앉아 기다리는 것으로 미술관 구경(아이들은 작품이 아니라 미술관을 구경했습니다.)은 끝이 났다.




  아이들과의 미술관 관람을 다녀온 후 갑자기 나의 미적 감각이 자극된 것일까? 오늘 아침에 일어나 거실 바닥을 보는 순간 나는 예쁜 그림 한 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젯밤 건조기에서 꺼낸 옷들을 열기와 눅눅함이 날아가도록 거실에 있는 놀이매트에 펼쳐놓았는데 그 모습이 오늘 보니 무언가를 섞어놓은 콜라주처럼 보였다. 놀이매트가 캔버스가 되고 그 위에 놓인 아이들의 옷가지와 우리 부부의 옷 한 두 개가 섞인 그 콜라주는 내가 전에 본 어떤 작품보다도 마음에 와닿는 예쁜 작품 같았다.


  자세히 보면 별 것 없는 아이들의 내복과 동네 외출용으로 입는 편한 옷들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모습들은 나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그 옷을 입고 지어냈던 표정과 웃음소리 그리고 울음소리, 그 옷을 입고 나에게 달려와 안겨 느껴지던 포동포동한 아이의 몸, 내 가슴팍에 묻던 오밀조밀한 얼굴의 느낌도 나에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작년 초여름 남편의 코로나19 확진으로 어쩔 수 없이 격리되어 있던 때, 답답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람이 없는 밤에 내복 바람으로 얼른 놀이터 주변을 돌고 들어왔었던 그때의 밤공기가 그 안에서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 바지와 윗도리까지 축축해진 내복을 입고 어정쩡하게 서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오줌을 쌌다며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의 모습도 그 안에 있었다. 오빠들에게 물려 입은 것이 아닌 고운 분홍색 새 내복을 받아 들고 기뻐하던 막내의 눈웃음도 그 안에서 보였다.


  우리가 그 매트라는 캔버스에서 만들어내는 콜라주가 어디 이뿐이랴. 때로는 매트 위에 널브러져 제각각의 모양을 뽐내는 아이들의 장난감들이 그것이

되고, 어떤 때는 아이들이 읽겠다고 책장에서 죄다 끄집어낸 알록달록한 책들이, 저녁마다 그 위에서 뒹굴며 놀고 있는 아이들과 남편 그리고 그 옆에서 빨래를 개키는 내가 그 캔버스 위의 콜라주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번 밖에 볼 수 없는 그 콜라주들은 아주 예전부터, 첫째가 꼬물거리던 그때부터 그 매트 위에서 수없이 만들어지고 사라졌다.


  우리에게 캔버스가 되어주는 거실의  놀이매트는 우리와 함께한  9 차가 되어 세월의 흔적을 가득 안고 있다. 막내의 등장으로 떠나보낼  없었지만,  면은  이상  수가 없어   면까지도 우리에게 바치고 있는, 아낌없이 주는 매트이다. 청소할 때마다  애물단지를 언제 내보낼까 싶었는데 이제 보니  캔버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위에서 함께 뒹굴며 울고 웃고,  그대로 소중하고 예쁜 추억들을 만들었구나 싶다.

  언젠가  캔버스가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사소하고 시시한 콜라주는 어느 시간에나, 어느 곳에서나 계속될 것이다. 티켓을 예매할 수도 없고 관람 기회도  번뿐인, 그러나 마음속에 영원히 전시될  소소한 작품을 오늘도 우리는 함께 그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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