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큰딸 이야기
세상이 숨을 죽였던 해, 2020년 봄은 분주했고 봄은 여느 때와 달리 긴장 됐다.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창문 너머로 바람만 스쳐가던 나날 속, 열 살의 아이는 조용히 한 세계를 떠나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섰다.
국제학교에서 싱가포르 로컬 학교로, 마치 낯선 대륙으로 건너가는 일처럼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언어는 같았지만 어조가 달랐고, 교실 안의 공기는 익숙한 듯 낯설었다. 친구를 사귀는 웃음의 높이,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는 속도, 급식 시간의 침묵까지—그 모든 것이 작은 아이에게는 무언의 과제였다.
그 아이는 말이 없었다. 다만 묵묵히 그 세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저앉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은 채 하루하루를 쌓아갔다.
그러던 어느 아침, 그날의 장면은 내 마음속에 시간처럼 멈춰 서 있다.
초등학교 졸업시험 날. 코라나로 뒤죽박죽 된 스케줄, 코로나 밀착 접촉자가 돼서 아이는 원래의 시험 현장에서 다른 교실로 배정이 됐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그대로 넘어졌다. 찢어진 무릎, 피가 배어든 스타킹. 그러나 아이는 울지 않았다. 통증을 꾹 눌러 삼킨 채, 학교의무실에서 제공되는 아이스팩을 묶은 채 무언의 침묵으로 다친 다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험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날, 아이는 자신보다 더 큰 삶을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시간은 흘렀고, 지금 아이는 명문 여자중학교의 교실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단단히 지켜가고 있다.
공부도, 인간관계도, 스스로에게 엄격한 그 아이는 단 한 번도 쉽게 무언가를 택한 적이 없다.
다섯 살 무렵 장난처럼 시작했던 바이올린도 이제는 어느새 영재라는 말을 들을 만큼 깊이 있는 음을 낸다. 악기를 들고 서 있을 때의 아이는 또 다른 사람 같다. 마치 소리의 세계와 하나가 된 듯, 숨결까지 정제되어 흐른다.
그 연습실 밖에서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한 음, 한 음에 녹아 있는 건 단지 기술이 아니라, 밤을 건너온 시간, 수없이 넘어졌다 다시 일어선 날들의 서사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나는 문득 멈춰 선다.
짠하다,라는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나는 아이만큼 치열했는가. 나는 아이만큼 살아내고 있는가.
딸은 내게서 태어났지만, 이제는 나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었다.
그 아이의 걸음은 작지만 깊고, 조용하지만 흔들림이 없다.
나는 오늘도 그 걸음을 따라 배우며 산다.
한 아이가 이토록 묵묵히 걸어낸 길이 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