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많은 물음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지만 이전에 올린 글의 제목인 분명해지기 위해 살아가는가? 는 그중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은 아주 오래전부터 분명히 정해져 있었으며(답: 그렇다), 다만 복잡해짐의 속도를 분명해짐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까? 가 오히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절박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이전 글을 쓴 후에 우연찮게도 앞선 물음과 답의 타당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만한 계기가 있었다.
타인의 특성이나 경험에 공감한다는 것은 대개 흥분되고 안심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어떤 나만의 고유함을 만드는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그를 바탕으로 한 나만의 깊은 통찰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온 이해나 개념 같은 것들은 좀처럼 타인으로부터 공감받고 싶지 않기도 한 것이 사실이고, 때로는 그럴까 봐 미리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대치도 않은 순간에 그런 경험을 할 때, 나아가 서로 공명하게 되었을 땐 그 특성이나 개념이 각자의 안에서 제 자리를 찾는 계기가 되어준다. 그저 하나의 정의였던 것이 내 안의 사고 체계,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 센터에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는다.
나는 유난히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나를 잘 아는 이들로부터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 “, ”너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게 네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 ”과 같은 말을 종종 들어왔을 정도로 나는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못된다(뒤에 적을 말들에도 불구, 자아도취자가 아님을 미리 알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난 그저 내가 타고난 성질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고, 나만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너른 세상을 향해 나만의 길을 개척해 가길 바랐다. 나의 색을 띤 찬란한 길, 잘 다져진 길을 남기고 떠나길 바랐다. 그게 인생이라고, 모두는 자기가 타고난 빛깔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왜 우르르 가장 밝아 보이는 빛을 향해 몰려가려 하는가? 그것 거짓이 아닌가?). 그래야 세상이 좀 더 건강해질 것이 아닌가(인류는 역시 자연의 돌연변이인가). 자연스레 사회의 보편적인 개념, 방식을 따르거나 그와 타협하는 것을 몸서리치게 두려워했는데, 어쩌면 그 안에는 내가 대개의 남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다는 자만심이나 자신감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지금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느냐는 차치하고) 나의 경우에 생존에 유리한 방식을 택하려는 동물적 본능이었을까, 잘못 자라난 신념이었을까? 그저 나답게 살 수 있다면, 아마 남보다 좀 더 빛날 수 있을 거라는 순수한 착각. 그렇게 오랫동안 세상이 나를 절로 바라봐주고 알아봐 주길 순진하게 기대했고, 그렇게 되지 않음에 어찌할 바 모르고 좌절해 왔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말하려는 이 특성이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바로 오해에 관한 것이다. 나는 꽤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슬프게도 그에 아주 잠식되어 살아온 편인데 그중 가장 내 삶에 영향을 많이 미친 두 가지를 단어로 표현하자면 오해 그리고 침범일 거라 생각한다(침범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적어보려 한다).
나는 나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이 조금의 오해도 없이 상대에게 또는 세상에 전달되기를 늘 강박적으로 바랬다. 한 가지 요소가 잘못 전달되면 연쇄적으로 나를 이루는 구조 자체가 뒤틀려 전달되고 결국 전혀 다른 내가 상대의 인식의 상에 맺힐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 두려움은 도저히 떨칠 수가 없는 것이어서 언젠가부터 잘못된 전달을 막기 위해 대개의 경우 나는 내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자연스레 스스로에게마저 점점 무미건조한 사람, 자신감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지루해 견딜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있는 그대로 인식되지 않느니 그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는 편이 내게는 훨씬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 선택이자 당시 당장의 나를 구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히려 창작물의 경우에는 좀 달라서 해석될 수 있는 많은 여지를 두는 것을 선호했는데(추상적 세계를 그대로 담고, 전달력을 높이려 크게 노력하지 않았는데), 창작물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그대로 전달하기란 워낙 불가능한 것이거니와 차라리 너무나 많은 요소가 제멋대로 전달된다면 결국 원래의 구조를 되찾아 제대로 전달될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적이 분명한 글(이 글은 아닌 듯하다)의 경우에는 좀 예외여서 오히려 읽기 편하다,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있다는 류의 칭찬을 종종 들었는데 이 또한 조금도 오해되고 싶지 않은 필사적인 두려움에서 기인한 친절한 전달력 덕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쯤에서 첫 문단으로 돌아가 글을 이어보아야겠다. 며칠 전 에니어그램을 공부하는 스터디 모임에서 나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한 분이 “오해되고 싶지 않다, 나를 이루는 것들을 박스에 차곡차곡 넣어 상대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 “라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을 정의해 둔 틀이 있으며 그 틀의 규격과 내용을 수정하는 데에 매우 엄격하다는 점, 정의에서 벗어난 태도나 행동을 보이거나 하여 또는 기타의 이유로 상대에게 잘못된 내가 전달되는 부분에 있어 수치심과 불안감을 느낀다는 점, 그게 너무나도 큰 부분이라 매 순간 긴장을 놓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이야기 등을 서로 나누며 공감을 넘어선 공명을 느꼈다. 흔치 않은 반가움과 안심됨, 무언가 분명 해지는 느낌도 들었지만 동시에 일종의 허탈감도 느꼈는데 세상에서 어쩌면 나만이 겪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어떤 세부적인 감정, 나만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신, 마음의 어떤 특이한 구조, 너무 오랫동안 나의 일부였기에 내 이목구비처럼 친숙한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열 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타인의 입을 통해 거울처럼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분명해지기 위해 살아가는가? 라는 바로 이전 글에서 다루었던 내게 답이 이미 나와있던 물음은 분명해져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바뀌었는데 내가 가진, 나의 정신, 마음을 이루는 것들 중 아주 흔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조차 나만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면 사람이 가진 세부적인 특성들은 그 출발점이 되는 유전자의 조합으로부터, 그 미세하고 촘촘한 결합들로부터, 호르몬의 작용, 경험과 기억, 상황과 환경 등 그 많은 과정의 영향을 받고서도 도무지 유일할 수가 없다면 그 특성들은 바운더리와 스펙트럼이 아주 넓어 도무지 분명해져서는, 정의되어서는 안 되는 무엇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와 같은 얼굴(고작 몇 가지 요소의 결합인 것만 같은데도!)이나 지문을 가진 사람이 없듯이, 같은 소재에 대해 완전히 같은 글을 써내는 사람이 없듯이 사실상 그것은 비슷해 보이더라도 온전히 나만 가진 무엇임이 맞다. 그건 유일하지만, 분명해지려는 순간 영혼을 잃는다. 공통되는 논리에 가두느라 다양성의 일부를 거세당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파악된 논리의 조각들을 가지고 더 깊은 무언가를 이해하기도 하며, 더 나은 수준의 창작을 위해서도 작은 요소들을 분명히 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온통 불규칙한 에너지의 변동성으로 가득한 세상을 직관으로만 있는 그대로 통찰해서 표현해 내기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시간(에너지의 변동성)이라는 개념을 빼고 보아도 복잡하기란 마찬가지다). 아이큐가 네다섯 자리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단지 나의 직관을 믿고 휘둘러 볼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거나, 감당하지 못할 만큼 시야를 넓혀둔 거만함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사실 내 안의 무언가가 납득 가능한, 이해 가능한 메커니즘을 가진 무엇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는 기쁨, 특별한 정체성을 가지고 싶다는 전체적 욕망과는 별개로 납득되고, 타당하고 싶었던 근원적 불안에 도움이 된다는 것만이 그저 현상적 본질이자 유일한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공감이라는, 감정의 영역에 속하는 넓고 깊은 세계는 그저 그대로 느끼고 즐기는 것이 그 본질에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