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이런 꿈을 꾸었다. 나는 어떤 예능 촬영장에 당일치기 스태프 알바를 갔다. 중간에 점심시간이 되어 모두 식사를 하는데 우물쭈물하다 자리가 없어 맨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밥을 다 푸고 남은 누룽지에 몇 가지 남은 반찬들을 먹었다. 식사 준비해 주시는 분의 눈치를 보면서. 그리고 계속 일을 하다 갑자기 실수로 어떤 버스를 타고 낯선 시내로 향하게 되었는데 돌아가서 출퇴근 기록지에 싸인을 해야 일당을 받을 수 있는데 돌아갈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아무 데나 내렸다가 화장실을 쓰려 어떤 빈 가게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밖을 보니 그 예능 출연진들이 이미 촬영을 마치고 시내로 나와있었다. 그 사이 가게 주인의 딸이 돌아왔고 나는 허겁지겁 그 가게를 빠져나와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돌아갈 방법을 몰랐고, 이미 촬영은 끝나 돌아가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내게는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왠지 익숙한) 수치심과, 그랬음에도 벌지 못한 돈만이 남았고 허리에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다.
꿈은 대개 흥미진진하지만 동시에 절망적이다. 낯선 공간 속 낯선 나의 모습, 온갖 에피소드로 가득 찬 시간은 도파민의 분비를 재촉하지만, 동시에 맥락 없는 사건의 흐름은 매 순간 조금씩 절망감을 더한다. 그러다 결국 꿈에서 깨어나면 대개 아쉬움보다는 다행감이 몰려온다. 어제의 꿈은 현실적인 공간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다지 흥미진진한 편은 아니었지만, 절망감은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종류의 것이라 그런지 작지만 더 분명하게 와닿았다.
이렇게 현실을 바탕으로 한 꿈이 아닐 땐 주로 허공을 둥둥 떠 다니고(나만 중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떠 다니다 방향을 잘못 잡거나 속도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곤경에 처하곤 한다. 쫓기고 있을 땐 그게 꽤나 두렵지만 동시에 스릴 있기도 하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지 않을 땐 대개 굉장히 어설프게 쌓인 높은 구조물을 오르곤 하는데, 그러다 지쳐 아슬아슬한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굉장히 다채로운 종류의 안정감을 느끼곤 한다. 평생 이런 식으로 살아도 좋다고 느낄 만큼. 게다가 그런 꿈속에서는 이상하게도 쫓기다 잡힌 적도, 높은 곳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진 적도 없었다. 늘 절망감보다는 아쉬움을 느끼며 꿈에서 깨어난 적이 많았다.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을 바탕으로 한 꿈, 즉 지금의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능력치와 상황 속의 나, 그리고 실제 주변인들이 나오는 꿈은 대개 절망감이 아니면 애틋함이라는 감정을 불러온다. 둘 다 내가 꽤 두려워하는 감정이다. 애틋함은 잃은 것들, 잃을 수 있는 것들,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픈 박탈감을 가지고 온다. 그 다양하고 복잡한 맥락의 흐름 속에는 모순이 가득하지만 그렇기에 더 깊은 감정을 이입시킨다. 그래서 꿈에서 깨면 다행스럽지만 동시에 매우 절절해진다. 강렬하고, 이런 게 삶인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반면 비현실적인 요소가 더해진 꿈에선 절망감보다는 비현실적인 설렘을 많이 느끼고, 애틋함보다는 성취감을 많이 느낀다. 현실적인 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런 꿈에서는 어떤 일이건 일어나길 바란다. 사실 난 이런 꿈속의 나에게 좀 더 일체감을 느끼는 것도 같은데, 그건 내가 그간 둥둥 떠다니는 삶을 살아온 것과 꽤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난 언제부턴가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기대하지 않기 시작했다. 분명한 것은 설렘과 기대감, 열망 속에 늘 무언가를 추구하고 기대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내게 이러한 상태는 그 자체로 치명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풍부한 상상력을 뒷받침해 주는 넘치는 충동성을 양분 삼아 지내온 시간들은 삶의 어떤 패턴을 만들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패턴에 익숙해졌다. 그러다 나이를 먹어가며 어떤 시점에서 특정 정도 이상의 반복되는 외부 자극으로 인해 내 안의 충동성을 억누르는 무언가가 발현되었고, 내 삶의 패턴을 좀 더 효율적인 것으로, 좀 더 현실적인 것으로 바꾸기 위해 이성과 논리를 담당하는 회로를 늘리기 시작했다(좋게 말해 그런 것이다). 이들은 내 삶의 패턴을 분석하고는 이런 재능, 이런 성향, 이런 조건의 조합을 지속해서는 좀처럼 네가 원하는 삶에서의 성취를 이루기는 힘들 거라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패턴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주었다.
당연히 하루아침에 가능할 리가 없었고, 그 과정에서 억눌려 앞으로 달려 나갈 수도, 두려워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충동성은 현재에 갇혀 혼란감,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풍부했던 상상력도 일부 함락되어 가라앉았다. 개선하기 위한 과정이라기엔 좀 절망스러운 부분들이 많았고(겁만 는 것도 같았고), 부작용과 의심스러움이 가득하지만 어찌 되었건 미세하게 패턴 자체는 개선, 아니 변화되어 가는 중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처음엔 설렘을 애써 찾으려 해도 찾아지지 않는 상태가 두려웠다(예전엔 너무도 쉽게 날 찾아오던 것들이다). 사실 지금도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어렵게 찾은 실마리에 마음이 꿈틀거리면, 내면의 무언가가 흔들리면 안 된다 단호히 경고해 주곤 한다. 이런 설렘들이 네가 그렇게 많은 것들을 경솔하게 시작하고 망쳐온 이유고, 그 때문에 본질을 보지 못하고 꿈속에서 헤매어 온 것이라고. 맥락 없이 모순만 가득한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지치지 않느냐고.
그래서 난 이제 가볍게 설레지 않는 상태에서 오히려 더 적은 양의 불안을 느끼며, 무엇도 쉽게 기대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게 된 것 같다. 이 또한 균형을 맞추어 가야겠지만 말이다. 다만 꿈같은 이상을 간직하고 그곳으로 향하려는 마음은 조금의 변함도 없이 여전하다.
오색 찬란한 구름 같았던 나의 이상은 땅 위에 우뚝 선 높은 산이 되어 형체를 갖추었고, 그리로 향하려는 나의 마음에는 설렘 대신 두려움이 가득하다. 산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리로 향하는 길이 험할 것임은 알겠다. 저 꼭대기에 결국 오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결국 오르더라도 그리 황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산속을 미리 다 상상해 볼 수는 없지만 내가 최소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뭣보다도 준비해야 할 마음이 무엇인지도 알겠고, 그저 한발 한발 최선을 다해 오르는 것이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인 것도 알겠다. 무엇보다도 구름이 아니라 산이니, 오를 방법이 있으니 다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꿈속에서 느낄 수 있는 성취감으로 삶을 꾸릴 수 있었던 시기는 지나간 지 오래지만 나는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걸 인식한 뒤로는 더 이상 꿈속에서 느껴지는 막연한 성취감, 깨면 순간순간 빠르게 흩어져 사라질 기억들로 삶을 채워갈 자신이 없다. 비현실 같은 꿈과 현실 같은 꿈 사이를 널뛰기하는 것에도 지쳤다. 널뛰다 보면 늘 진짜 현실은 잠깐 스쳐 지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저 산을 오르기로 한다. 불안과 두려움을 움켜쥐고 올라보겠다. 둥둥 떠서 빠르게 바람을 헤치고 날아가지 못해도 괜찮다. 한발 한발 현재가 가득한 땅을 밟고 올라보겠다. 그렇게 오르는 길에서, 오른 봉우리들에서, 빠르게 흩어지지 않는 성취감을 오랫동안 움켜쥐어보고 싶다.
그리고 설사 그러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나는 꿈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싶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황홀감은, 내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이상은 꿈속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여기에서 만들어갈 수 있음을 무엇보다 잘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