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 꽃을 피우는 자리의 향기
캐나다 동부에는 ‘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Prince Edward County)’라는 곳이 있다. 크지 않고 아담한 지역이다. 라벤더와 관련된 여행지들을 찾아보다가 그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라벤더 밭과 와이너리로 유명하다. 인구 25,000명이 모여 사는 자연이 아름다운 지역이다’라는 설명을 읽었지만 직접 가 보기 전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공기가 얼마나 깨끗할지,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다만 온통 보랏빛으로 뒤덮인 땅의 풍경을 떠올렸을 뿐이다.
만약 여름에 갔더라면 실제로 그런 풍경을 만나게 되었는지 모른다. 발길 가는 곳 어디서나 풍기는 라벤더 향을 느끼면서 와인 농장 투어에 참가해 와인을 마시는 것. 인간이 가진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향기가 전해주는 행복감이 크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천상의 풍경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삶도 여행도 그렇게 원하는 대로, 뜻한 바대로 수월히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우선 일정부터 그렇게 맞출 수가 없었다. 가을. 라벤더 농장에 가기 적절할 때는 아니지만 휴가는 짧았던 것이다.
혹시 라벤더가 아직도 남아 있을까 하고 기대를 했지만 정보를 찾아보니 이미 꽃피는 시기는 지나 있었다. 여름에 활발하게 열렸던 지역 축제들과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포스팅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몇몇 와인 농장이 열려 있다는 안내는 읽을 수 있었으나 그것 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약간은 실망할 준비를 하고, 그래도 그곳을 가 보기로 했다. 우리가 머물던 토론토에서 차로 세 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여름에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 '가을이니 꽃을 볼 수 없을 텐데...' 차를 타고 가면서도 머릿속에 아쉬움이 맴돌기도 했다.
401번 고속도로를 타고 우리는 달렸다. 캐나다의 가을 하늘은 한국의 하늘만큼이나 높았다. 게다가 깨끗한 공기 때문인지 그 청량감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리는 동안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따뜻한 햇빛이 차창을 비추고 모자 아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눈 앞에 날렸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의 잎들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곧 그 유명한 캐나다의 단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도로를 지나자 시골길로 들어섰다. 작은 마을들이 연이어 보이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주택들이 이어졌다. 집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앞에는 우편함이 서 있었다.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게 꾸민 우편함들이 귀여웠다. 일상의 작은 부분들을 정성스럽게 가꿔가는 집주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마을에 군데군데 자리한 주택뿐만 아니라 넓은 포도밭 가운데 드문 드문 자리한 커다란 건축물들도 볼 수 있었다. 집인지 공장인지 알 수 없는 그 건물들은 포도밭 너머로 멀찍이 서 있었다. 길을 달리다 차를 세워 나무판에 새겨진 와이너리의 이름들을 읽어본다. 차창을 내리고 햇빛과 바람을 다시 한번 느껴보았다. 다르다. 우리 외에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포도밭뿐이었다.
와이너리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라벤더 농장으로 곧장 향했다. 라벤더 밭을 무척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달리다 보니 농장이 보였다. 라벤더 밭에 도착했음은 굳이 표지판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농장의 건물과 벽들에 보라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차를 세우고 라벤더 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스듬히 등을 받치고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 두 개가 밭을 향해 놓여 있었다. 짐작대로 라벤더는 모두 수확되어 보랏빛 땅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놓여 있던 의자 두 개, 넓게 펼쳐진 지평선 사이에 우리 둘 뿐이었던 가을의 한 순간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라벤더가 피기 위해서는 몇 계절이 더 지나야 했지만 그런대로 그것도 괜찮았다. 지평선은 여전히 펼쳐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 대신 바람과 햇빛이, 우리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 고요한 오후였다.
벌판 위에는 초록 잎들이 남아 있었다. 지난여름의 라벤더 향은 은근하게 공기 중에 퍼져 있었다. 아마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라벤더가 피었다가 수확되고, 또다시 피기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에도 그 땅에 남은 향기는, 건물에 배인 라벤더 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주 희미하지만 기분 좋게 사람의 코를 간지럽히는, 어딘지 마음이 설레는 그런 향이었다. 꽃이 남겨놓은 한숨 같은 그 향을 나는 깊게 들이마셨다.
우리는 한동안 라벤더 밭에 서 있다가 옆의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젊은 여성 한 분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가게에는 라벤더로 만든 비누와 오일 같은 작은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양봉을 겸하고 있어 라벤더 꿀을 팔기도 했다. 나는 지인들에게 기념품으로 선물할 비누 몇 개를 고르고 자신의 아름다운 집에 머물게 해 주었던 고마운 친구를 위해 꿀 한 병을 샀다.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해가 지기 시작하고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짧은 여행 동안의 그 하루가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다. 라벤더 밭이 서서히 멀어지고 우리는 서쪽을 향해 달려 다시 친구의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 집에서는 아가 향기,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떠난 자리도 좋구나.' 나는 생각했다. 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에서 사 온 라벤더 비누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책상 위에 놓여 있다.
bitterSweet life + travel
타이틀 사진: 엘렌의 가을
text and photographs by 엘렌의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