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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렌의 가을 Jan 09. 2018

삶이라는 자기표현

달과 종이 달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각자의 표정을 얼굴에 머금은 채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 다양한 나이, 얼굴형, 체형, 걸음걸이, 동작, 목소리의 사람들이 길을 걸어간다.     


창 밖의 풍경을 곰곰이 바라보다 생각한다. 사람은 삶이라는 과정 전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주며 살아가는 것 아닐까 - 자기를 표현하면서.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굳이 어떤 예술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동,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한 남자가 별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입던 티셔츠에서 벗어나 어느 날 “알로하(aloha)”라고 쓰인 티셔츠, ‘바로 그’ 티셔츠를 입기로 하는 것. 이런 작은 행동도 하나의 자기표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매일 자신을 다그치면서 정신없이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가 “알로하”라는 이 기분 좋은 울림의 인사말을 의식하며 티셔츠를 고른 순간 그건 그에게 새로운 신호로서, 표현으로서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날씨 좋고 여유로운 하와이의 나날을 자기 삶에 불러오고 싶은지도. 하와이에 가는 것은 여러모로 상황과 조건이 필요하고 그에게 번거로울 수도 있다. 이에 비하면 티셔츠 한 장을 새로 입는 것은 훨씬 손쉬운 일이다.


한동안 무거운 마음이 이어지던 나날 중에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한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 거기에 그의 의식이 있고, 그가 그렇게 행동하고, ‘표현했다면’ 아마도 그 티셔츠는 위력을 발휘하리라. (거기에 미약하나마 나도 힘을 보태고 싶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표현은 소비라는 매개행위를 통해 이루어지기 쉽다. 자신에게 필요하고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선택하고 구매하는 것, 그것은 그의 삶의 상태의 일면을 보여줄 수 있다. 흰색이나 회색의 모노톤만을 입던 사람이 어느 날 색상이 강렬한 옷을 입었을 때 그의 기분과 상태, 더 나아가 가치관까지도 변화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사람의 행동방식은 그 심리 상태가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통로이다. 가쿠다 미쓰요의 소설 <종이달>에서 보여주는 인물의 일탈은 갑작스러운 소비방식의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은행 사원이 되어 외근을 하던 그녀는 더운 날씨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이 켜진 백화점을 가로질러 걸어가기로 한다. 그녀는 백화점 점원의 설명에 이끌려 평소 쓰지 않던 화장품을 구입하게 된다. 자신의 일을 시작한 그녀가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 그것은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뿌듯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계산을 할 때 약간의 금액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하자 그녀는 - 이전과 달리 - 큰 액수도 아니니, 잠시 수중에 있는 타인의 돈을 빌려도 괜찮겠지, 라고 넘겨버리고 만다.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저지른 그녀는 바로 돈을 채워 넣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건은 그녀의 삶에 어떤 균열이 발생하고 있음을, 내면에 ‘뭔가 이전과는 다른 것’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소설은 그녀의 삶이 그 이후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보여준다. 상처받아가는 그녀의 모습과 그 안간힘은 안타깝다.

마음이 허전할 때, 멋진 물건들로 가득한 이 세상은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허기에서 비롯된 소비로 이루어지는 표현 방식은 결코 마음의 공백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경제적 상황이 끄달려 올뿐만 아니라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씁쓸함만을 남기기도 한다.      


그녀는 그녀의 삶이 어떠한 부분에서 흔들리고 있는지를 알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녀에게 지금의 삶은 적절한 자기표현의 방식이 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운 그녀 자신에 대한 현명하고 공정한 이해가 필요했다.



한편 자신을 표현할 형식을 찾고 그 삶에 대한 성실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기표현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삶을 제대로 이끌어 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전체, 그것은 결과보다는 되어가는 과정을 향한다. 삶의 매 순간순간은 중요한 선택, 표현의 모멘트가 된다.


이와 같은 삶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자기와의 약속에 충실하려 한다는 점에서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게 특별하다. 한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 타인에게 대하는 태도와 어투,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하는 방식, 자기 주변의 공간과 사물을 다루고 대하는 모습과 습관…. 이 모든 것이 자기표현이 된다.


자신의 공간을, 거울 속의 자신을, 매일 바라보게 되는 최우선의 관찰자는 자기 자신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행복감을 느낀다. 나 자신이 바라보는 첫 번째 풍경을 만드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또한 나는 이 세상을 둘러볼 타인의 풍경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자기표현이 매 순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면 삶의 어떤 세목들도 허투루 지나갈 수 없이 뜻깊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일의 결과뿐 아니라 일의 과정 역시 중요해진다. 굳이 독특해 보이지 않아도 좋다. 지금의 시대, 사방에서 외치는 '크리에이티브'가 나의 말이 아니어도 괜찮다. 보이는 것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표현적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을 부드럽게 지키며 때로 수정해 나가고 작은 일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 속에서

나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그들만의 아름다운 개성을 느낀다.



'넌 무엇이 되려고 하니?' 우리에게 흔히 묻는 질문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이 세상을 어떠한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싶은가요.' '그것을 통해 무엇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자 하나요.' 리고 '오늘, 지금, 어떻게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다시 묻고 싶다. 나 자신부터 시작해서.


 


bitterSweet life + books/cinema

글: 엘렌의 가을

이미지 출처: 소설 원작 영화 <종이 달>(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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