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용'이란 말에 대하여
영화 리뷰를 쓰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텔레비전 매체의 만화영화로부터 시작된 개념인지 모르겠으나 소위 애니메이션은 ‘애들’이 보는 것, 그러므로 '진지하지 않은 것'이란 인식이 있는 것 같다. 특히 의미 있음의 선행 조건으로 엄숙함과 진지함을 전제하곤 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이와 같은 고정관념을 강화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을 잠시 미뤄두고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을 볼 기회를 갖게 된다면 그 편견은 수정될 것이다. 콘텐츠의 판단 기준에 대해 달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잠시만 주위를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어른용을 표방하는 많은 콘텐츠 중에 엉성하게 만들어진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주의해야 한다. 엉성함에도 급수가 있다. 의도적인, 예술적인 엉성함도 있다.)
‘유치하다’는 표현을 우리는 어른들에게 자주 쓴다. 나는 아이에게 유치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그저 ‘아이다울’ 뿐이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다. 우리는 온갖 유치함의 예들을 성인이 된 후 사회생활을 하며, 뉴스를 보며, '어른들의 세계'에서 목격하고 경험한다. ‘그럴듯해 보이기만 하면, 내가 너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니까, 혹은 남들도 다 이렇게 하니까, 나는 이렇게 말해도 돼, 행동해도 돼, 난 몰라.'
그 끝에 나는 '메롱'이라는 환청을 듣는다. 나는 사람들이 가끔 ‘치졸하다’는 표현을 써야 할 때 ‘유치하다’는 말을 씀으로써 사건을 슬쩍 앙증맞게 만들고 적의를 달래며 더 나아가 괜한 아이들을 모욕하는 것 같아 불쾌해질 때가 있다.
어린이용이라는 것은
어른이 이 세상에서 느끼고 있는 것의
최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인터뷰(Animage, 1989년 5월호)에서 애니메이션 작가이자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 말이다. 나에게 이 한 문장은 그의 작품의 심장처럼 다가왔다. 그에게는 어른용과 아동용이라는 구분법이 없는 것이다. 하야오의 정의에 따르면 아이들을 위한 것은 다만 '어른용의 최상급 버전'이다. 나는 그의 작업의 개성과 핵심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용, 더 나아가 아이들의 세계에 대한 그의 뚜렷한 철학은 첫 시작부터, 작품에 임하는 전제부터 남다른 시작점을 확보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콘텐츠가 만인을 위한 것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인으로서의 경험이 필요한, 폭력이나 섹슈얼리티 등의 민감한 이미지는 주의 깊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장르가 무엇이건, 주제가 무엇이건, 예술이 창작자의 생각, 감정, 사상, 지혜와 진실 등을 타인과 나누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다.
다만 아이들을 위한 것은 같은 생각과 감정, 철학을 전하더라도 세심한 관심을 요구할 것이다. 작품은 그들의 감정과 공명할 정도로 섬세해야 한다. 재미있고 유머 있으면서도 난해하게 표현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창작자가 작품 안에서 스스로 길을 잃을 경우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기는 난감해진다. 쉬운 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창작자가 그 안의 개념 - 더 나아가 철학 - 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소화했다는 의미이다. 아이들에게 전해질 그 철학에는 책임도 따른다. 삶의 경험이 많지 않은 시기에는 주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막론하고) 창작자의 개인적 욕심이나 뒤틀린 시각에서 비롯된 작품은 보는 이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보이지 않게 주입된 가치관은 정신에 스며들기에 수정하기도 어렵고 강력하게 삶 전반을 사로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고 싶지만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에 담겼다 해도 그 철학까지도 '아동용'이어서는 곤란하다. 어른들의 관념이 가진 유치함을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에 뒤집어 씌우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 어렵지 않은 표현방식을 선택하지만 일차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풍부한 의미가 생성될 수 있도록, 섬세하고 조심스럽고 아주 세련되게, 그러나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다 보니 하야오의 문장이 생각난다. 이것이 과연 어린이만을 위한 방식일까?
아이들은 동요도 좋아하지만 고전적인 악기 소리도 좋아한다. 많은 아이들이 접해 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을 뿐이다. 좋은 음악이라고 해서 반드시 값비싼 티켓의 음악회에 간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본을 지킨 괜찮은 질의 소리다. 조율이 된 악기, 실력과 정성을 가진 연주자 같은 것. 아이가 음악의 진실이랄까,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러고 나서 그것을 자신의 삶에 들일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가능한 좋은 것을 선별해 들려준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위한 디즈니, 픽사(Pixar) 스튜디오의 음악, 지브리 스튜디오의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도 뛰어나다.
조잡하게 연주된 음악, 엉성하게 만들어진 음악이 문제다. 어른이라면 'b급 문화'같은 또 다른 문화적 코드로 그것을 즐길 수도 있다. 뛰어난 b급 문화는 위계 자체를 조롱하고 파괴하며 그것을 초월한 의미 있는 문화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문화적 경험이 쌓이지 않은 아이가 아름다운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고장 난 악기 소리를 듣고 음악 전반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음악이 얼마나 좋은 것일 수 있는데.
큐레이터로 일하며 종종 어린이를 위해 기획된 전시를 둘러볼 때가 있었다. 그러나 때로 갸우뚱하며 전시를 보곤 했다. 앙증맞은 폰트로 커다랗게 '어린이미술관'이라 간판을 붙여 놓는다 해서 또는 동물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로 채우고 움직임에 반응하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 작업을 보여주면(아쉽게도 그 작품들은 자주 고장 나 있다) 그곳이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될까. 그럴 때면 나는 콘텐츠가 아이들을 평가절하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기획 측의 의욕과 애정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지만 '어린이용'에 대한 통념이 '어린이용'을 표방해 기획된 전시의 맹점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성장단계나 오감 발달 같은 것을 고려해 작품을 선정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단지 감각의 자극에 그치는 것 또한 아쉬운 일이다. 그 목적뿐이라면 친구나 가족과 자연에서 뛰어놀거나 찰흙놀이나 음식 만들기를 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예술에는 예술이 갖는 최고의 강점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일차적 감각 이후의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1960년대 서울의 도시개발이나 시리아 난민 이슈를 배경으로 한 현대미술 작품을 보러 갈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생각보다 많은 작품들이 일정 나이 이상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번역'될 수 있다. 특히 작품이 전달하는 의미와 감정의 보편성은 아이나 어른이나 동일하게 갖고 있는 인간적 요소와 닿아있다. 아니, 오히려 아이들의 신선한 감각이 더욱 강렬하게 느끼고 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예술에게는 예술이 열어주는 대화의 방식이 있다. 그는 언뜻 다가가기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알고 보면 개성 있고 속 깊은, 너그럽고 잘 들어주는 친구다.
캐나다에서 기획했던 전시를 위해 초등학생 관람객들과 큐레이터 토크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 사회의 초중등 교육 제도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나는 그 아이들이 어떻게 전시에 반응할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특히 현대미술 전시는 성인들에게도 난해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 더욱 그랬다. 이미 한국의 아이들과는 경험이 있는 상태였지만 그곳의 아이들을 그렇게 다수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참고로 전시는 '언어와 의미의 전달'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캐나다와 한국 작가 5인이 참여했다) 이곳의 아이들은 무슨 말을 들려줄까? 전시가 어렵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며 말하기를 꺼리지는 않을까? 어떤 방식으로 대화할까?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한국 작가의 작품에 어떻게 반응할까?
큐레이터 토크 당일, 나는 몇 가지로 내가 미리 생각해 보아야 할 바를 정리해 보았다. 1) 어떠한 시간의 구성과 공간적 동선으로 2) 어떠한 언어와 표현으로 3) 내가 갖고 있는 정보와 해석의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특히 3)은 무척 중요하다. 정보를 일부러 알려주지 않는다거나 숨긴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말하는가, 타이밍이다.
또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하는 자 스스로의 자기 성찰이다. 우선 관객에게 작품과 만날 시간을 주어야 한다. 작품에 반응할 여유도 없이 정보를 주입하는 것은 작품을, 전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반예술적이기까지 하다. 공들여 만들어 놓은 오솔길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적정한 정보를 적절한 시점에 이야기한다. '적절한'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은 전시에 따라, 또 큐레이터에 따라 그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큐레이터 자신의 이해와 해석이 큐레이토리얼 프로젝트에는 필연적으로 개입되지만 우선 작품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바라보는 성찰적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지나친 해석은 작품의 손발을 묶고 자율성을 해친다. 작품은 큐레이터의 존재와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거기에 있다. 작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극적인 말이나 내용은 관람객의 귀를 끌 수 있겠지만 결국 기획자, 작가, 작품, 관람객 모두에게 해롭다. 무엇보다 나는 거기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
아이들의 방문은 귀하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평론가나 기자들의 방문과는 또 달랐다. 추운 겨울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아끼는 스웨터를 꺼내 입고 거울을 보며 빙그레 웃어 보았다. 아시아인들의 얼굴을 무뚝뚝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시 인위적인 것은 어려웠다. 편안한 마음으로 임하기로 했다. 다만 아이들이 말하기에 불편을 느끼지 않는 '눈치 보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서른 명 정도의 학생들이 갤러리에 줄을 서 입장했다. 갤러리 교육 담당자가 나를 소개해 주었다. 반짝이는 검은색, 갈색, 초록색, 푸른색 눈들이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들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 그래, 의미를 섣불리 날려버리지 않으면서 이해 가능한 말을 사용하자. 시간을 잘 구성하자. 나는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우선 전체 공간과 공간의 구성을 설명했다. 주로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대화였다. 의도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그 후 공간 속으로 들어가 작품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긴장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움이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크게 보자면 아이들과 질문과 소감을 나누는 어떻게 보면 일반적인 구조의 대화였다. 그러나 모든 중요한 것들이 그렇듯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가 많은 것을 결정했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주의 깊게 나의 말을 듣고 서로의 생각을 말해 주었고 우리는 개별 작품에서 시작하여 더 나아가 작품과 작품 사이의 관계성과 그 의미에 대한 대화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아이들은 때로 거침없는 상황을 연출해내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웃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그들은 30분에 달하는 영상작품을 끝까지 보았다! 그들의 질문과 대답은 솔직하고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날렵하고 흥미로웠다. 큐레이터인 나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한 자연스럽고 멋진 해석을 아이들이 꺼내 놓았을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짜릿함을 느꼈다. 이미 이 전시는 내 것도, 작가들의 것도, 갤러리의 것도 아니었다. 모두가 그 안에 있었다. 아이들은 이 전시의 최종 의미를 그들의 생각과 느낌으로 빚어내고 있었다. 참으로 훌륭한 관람객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가능성을 품게 되었고 작은 용기를 얻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의 생각의 폭과 재기에 깊은 감명도 받았다. 다른 날의 또 다른 그룹은 그 도시의 영재반이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은 그룹과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했다. 미술 앞에서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훌륭했다.
아가에게 가장 퀄리티 좋은 음식은 신선한 재료로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게 요리된 것, 아직 이가 없는 아이를 고려해 만들어져 깨끗한 그릇에 담긴 음식일 것이다. 꼭 값이 비싸거나 화려할 필요는 없다. 그 이후의 화려함은 어른이 되어 스스로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며 자신을 알아갈 것이다. 다만 생애 초기의 경험은 기본 바탕과 기준을 형성할 수 있기에 중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콘텐츠에 대한 초기 경험은 이후 한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정신 영역을 일구어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내가 아는 한 디자이너는 어린 시절 즐겨 봤던 동화책의 그림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말한다.
시각적인 자극을 말하자면 나이가 어린아이일수록 박물관에 가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나 자신이 근현대 미술관에서 일했으므로 미술관을 권하고도 싶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초등학교 고학년 - 중학교 이후 정도가 되었을 때 미술관을 추천하곤 한다. 물론 순수한 시각적 자극을 느끼기를 원한다면 어디든 좋다. 자유롭고 혁신적인 예술을 보고 싶다면 근현대미술이 더 나은 선택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고려한다면 아주 어린아이들에게는 박물관을 권한다는 뜻이다.
미술관의 작품들은 대개 근대(서구화) 이후의 산물로 그 제작 배경에 역사적 조건들이 자리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동시대 미술은 잘 안내되지 않으면 보고도 무엇을 보았는지 어른들도 아리송할 수 있다. 생각보다 그 안내에도 어떤 솜씨와 경험 같은 것이 필요하다.
박물관의 작품들은 비교적 주제와 형식이 이해하기 쉽게 연결된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산>하면 ‘산’을 그린 식이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아름다움의 보편 차원이랄까,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반면 근현대미술은 이 아름다움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펼쳐진다. 통념적 추함도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하고 이를 부수어 나가며 확장시킨다.
근대 이전은 많은 작품이 장인의 손길에 의해 만들어졌던 때이다. 공예의 경우 특히 그렇다. 그 시대의 작가들은 지금처럼 영화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분야라는 이름으로 예술이 지금처럼 칸칸이 나뉘지 않았으며 보다 더 통합된 상태로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종교, 정치, 사회 등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정신적 토양은 지금의 우리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들이 만든 것들에는 우리와 다른 꿈을 꾸던 이들의 손길이 남아 있다. 그러나 자유와 아름다움을 꿈꾸는 인간의 성정과 감정은 수백 년, 천년의 시간을 지나 그대로 이어진다. 그것은 어른과 아이를 초월한 가치이다. 신화와 전설이 살아있던 시절, 옛사람들의 판타지와 상상은 때로 놀랍다. 그 예술적 지향에 따라 거칠게도 정교하게도 구현된 디테일과 완성도를 보며 커다란 경이로움을 느낀다. 아이들이 예술품 안에 무수히 퍼져 있는 미적 감각을 눈으로 몸으로 쌓아가는 것은 이후의 그들의 삶에 큰 정신적 자산이 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높은 문화 수준을 기대하는 것은 다행히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다. 시간과 관심은 필요하다. 국내외의 적지 않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무료입장을 허용하거나 특정 요일이나 시간에 전면 개방한다. 미술관이라는 곳이 처음 생겨났을 때 그곳은 특정 계층만이 갈 수 있는 특권층의 공간이었다. 지금의 시대는 그렇지 않다. 이 시대에 태어난 장점을 최대로 활용하자.
예술은 특정 층에 귀속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소유권을 줄 뿐 결코 자신의 모든 것을 넘기지 않는다. 박물관에 전시된 도자기들은 이름을 남기지 않은 또한 남길 수 없었던 도공들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만든 것 앞에서 어떤 컴퓨터로도 계측할 수 없을 것 같은 곡선의 아름다운 물결을 본다. 불완전한 듯 보이지만 그래서 더 매력 있는 곡선과 빛깔을 보며 우아함이란 이런 것이구나 감탄한다. 그것을 만든 마음결은 도공의 사회적 계층과 상관없이 지상 최고급의 것이다. 그 정신의 깊이와 높이는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우리와 관계 맺는 존재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마음의 바탕을 다져준다.
"생활은 낮게, 생각은 높게."(시인 예이츠)
시인 백석이 좋아하던 말.
문화는 사람에게 깊은 자존감을 키워준다.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올바르고 깊은 자존감을 갖춘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카페 옆자리의 한 사람이 4인용 테이블에 앉아 신발을 벗고 앞의 의자에 두 발을 올린 채 책을 읽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미움받을 용기>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최근 자존감이 이 사회의 화제였다고 하지만 때로 왜곡된 자기애와 자존감은 구분되지 않는 것 같다. 적당한 자기애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괜찮은 영화를 보아도, 모든 것을 자기 합리화를 위해 끌어당겨 온다. 배울수록, 읽을수록 공고해지니 오호라-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것은 자존감과는 거리가 멀다.
자존을 지닌 사람은 안하무인의 자기애로 들어찬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높은 문화 수준을 기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문화 수준은 그가 걸친 옷이나 장신구가 아니라 정신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수정 가능한 존재임을 받아들인다. 어쩌면 그건 그저 사실이기에 대단한 깨달음도 아니다. 자존감은 여유를 주고 자기 이외의 존재를 배려하려 한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준다. 영화관에서 말소리를 조심한다. 길에서 몸이 부딪히면 실례를 표한다. 타인을 향해 재채기를 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사람을 면박 주지 않는다. 타인에게 자연에게 함부로 행동하게 되었을 때 자괴감을 느끼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자존감을 키워줄 수 있는 사회적 조건도 절박하다. 존중이 없는,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폭력이 행해지는 사회는 구성원들의 자존감을 강탈하려 한다. 결국은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인간성으로 구성원들을 몰아붙인다. '나 왜 이렇게 되어가지?' 문득 생각할 뿐이다. 자존감을 위태롭게 하는 사회의 인간은 허망함을 느낀다. 공동체는 뿔뿔이 흩어진다.
살아온 세월은 경험을 가져다주지만 성찰되지 않은 삶은 아집을 쌓아갈 뿐이다. 우리 모두는 시간을 통과해 간다는 인간적 조건에 놓여 있다. 시간은 우리를 현명하게 만들어줄 수 있지만 오래 살아왔다고 해서 반드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시인들은 20-30대에 인간의 진실을 말하는, 불멸의 시를 썼다. 경험이 늘어간다는 것이 가진 이면을, 무분별한 자기 확신이 늘어나고 그것이 마음을 굳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인간적 한계로 깜박할 때마다 끊임없이 환기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고귀한 투쟁이다. 자신의 삶 한쪽에 아이의 정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둘 수 있다. 그 아이는 가장 약한 자,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이다. 벌거벗은 임금 앞에서 질문할 수 있는 존재다. 나는 그 아이의 정신이 역설적으로 어른의 품격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정신의 품격이 높은 아이들이 있다.
그들이 읽는 이야기, 그들이 보는 것은 그 마음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최고 수준의 독자이며 관객이다.
정신의 영토는 경제적 가치와 실용주의만이 최고의 가치라 강요되는 지금의 시대에 개인이 지켜낼 수 있는 자신만의 땅이다. 그 영토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좋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아줄 것이다.
인간 정신은 세상이 쉽게 들이대곤 하는 어린이/젊은이/노인이라는 분류법을 넘어선다. 거기에는 정신의 풍경이라는 하나의 경지가 있을 뿐이다. 어린이용이니 청소년용이니 하는 것 역시 편의를 위해 덧붙여진 것일 뿐 단지 제대로 만들어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이 진실이 아닐까.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거기에 약간의 기회와 행운이 더해진다면) '함께' 즐길 수 있다.
그 뜰은 넓고도 넓다.
bitterSweet life + art / cinema / museum
text by 엘렌의 가을
<달에 사는 토끼>: 백남준 아트센터 소장
<금동 용두토수> <화조구자도>: 리움 소장
<달항아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소장처 소장품 정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