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과장 9편
지이잉
전치 4주가 나왔다. 오른쪽 발목 인대가 3개나 파열되었다. 그 외에도 팔꿈치에 멍이 들고 무릎과 손바닥에 찰과상을 입었다.
킥보드의 시동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빠른 속도로 출발하자 몸이 놀라 굳어버렸다. 너무 오랜만에 타서 속도감을 잊었던 것이다. 차라리 손을 빨리 놨어야 했는데 고가의 킥보드가 넘어질까 봐 끝까지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그 바람에 아주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족히 한 달은 누워 있어야 하니 답답하기는 해도 가만히 차려 주는 밥상만 먹는 건 할 만했다. 주말이면 지겹게 듣던 집안일 좀 도와달라는 잔소리도 패스, 애랑 놀아주는 것도 패스, 이건 정말이지 좋았다. 이제야 남자로서 누려야 할 가장의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킥보드는 비탈길인 아파트 입구를 굴러 주차금지 턱에 처박혔다. 비싼 값을 하는지 고장나진 않았지만 제값 받고 되팔기는 글렀다. 개시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3백만 원짜리 패딩은 찢어졌다. 라이더는 시작도 못 해보고 몇백을 날린 셈이었다.
안경과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안경과장은 몇 년 전부터 핸드폰 울리는 게 반갑지 않았다. 특히 요즘 문자 올 때는 뻔했다. 돈 쓴 문자 거나 돈 내라는 문자겠지.
- [Web발신]
농협카드 승인 안*경님
620,000원 일시불
링컨버클리 어학원
‘아, 결국 끊었구나.’
얼마 전 미정이가 소개해줬다는 유명한 영어학원에 아이를 보낸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어마어마한 금액에도 불구하고 엄마들이 여기 못 들어가 안달이 났다는 얘기도 생각났다.
지난달에는 아이가 레벨테스트에서 떨어져 등록을 못했다. 내심 다행이다 싶었는데 경은은 난리가 났었다.
“미정이 아들은 붙었단 말이야. 그러게 내가 영어유치원 계속 보내자고 했지?”
“야, 지금도 많구먼 뭘 더 다녀.”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마. 다른 애들은 더 많이 다녀. 쟤 나이에 학원 3개면 진짜 팽팽 노는 거야.
이러니까 한국에서 애 교육 제대로 시키려면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지.”
그 후 아이를 들들 볶더니 결국 붙었나 보다.
“이건 다 투자야. 노후 준비라고.”
경은은 아이 교육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안경과장 부부는 노후 준비를 따로 하고 있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장손이라고 누나들보다 뭐 하나라도 더 받았고 그게 당연했다. 받기만 했지 뭘 줘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도 자신의 품위유지비를 줄여 가면서까지 돈을 줄 생각은 없다.
안경과장의 부모는 먹을 거 입을 거 아껴가며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줬지만 그는 절대 자신의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는 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했다.
‘노후는 딸이 책임지겠지. 그래그래..’
안경과장이나 경은이나 둘 다 공부는 그저 그랬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경은은 공부머리가 없으니 더더욱 어릴 때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경과장은 그 반대다. 인서울 못 할 거면 차라리 다른 가능성에 돈을 쓰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경은의 머리를 닮았다면 인서울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야, 사실 대한민국은 예쁜 게 장땡이야.
차라리 대학 학비로 전신 성형 쫙시켜서
클럽 보내는 게 남는 장사야.
가서 부--잣집 아들 하나 물어오면
너랑 나랑 팔자 피는 거야.”
경은은 ‘그건 그렇지..’라며 동조하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안경과장은 진지했다.
“어차피 물려줄 재산도 없는 데 그게 훨씬 이득이지. 어?! 재벌집 같은데 시집이라도 가-봐! 그럼 우리도 남은 평생 남들한테 갑질 하면서 떵-떵-거리고 사는 거야! 인생 한방이라고!”
들을 땐 시큰둥해 보이던 경은이 나중엔 더 적극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세뇌해야 된다며 기회가 될 때마다 딸아이에게 말했다.
“골고루 먹어야 예뻐지지. 그래야 왕자님처럼 돈 많은 남자랑 딴딴 따단-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아아~ 할 수 있는 거예요.”
“나중에 커서 남자들이 못생겼다고 ‘에이, 결혼 안 할래' 이러면 어떡해? 엄마 아빠는 그때 되면 늙어서 돈도 못 벌어. 그럼 우리 셋 다 집도 없이 막 길에서 자야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어?”
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눈이 똥그래져서 질색하는 당근도 먹었다. (경은은 이 참에 편식하는 버릇도 고칠 수 있다며 좋아했다.) 그 모습이 재밌어 부부는 핸드폰으로 연신 아이의 모습을 촬영하며 깔깔 웃었었다.
그랬는데 학군 좋은 곳으로 옮기자마자 아내의 교육병이 도졌다. 이미 학원 2군데 다니는 것도 허리가 휘는데 그 비싼 영어학원을 또 보내다니.
매달 적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모바일 게임도 지겨워져 주식앱을 켰다. 욕부터 나왔다. 더 큰 손실을 막으려면 돈을 더 끌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어디 돈 나올 구석이 없었다.
대체 왜 돈이 없을까.
분명히 자신의 부모보다 여유롭게 살고 있는 데 왜 돈이 없는 걸까?
‘그때 엄마가 준 돈. 그걸 굴려볼까.’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나중에 딸아이 대학 학비에 보태라며 몰래 찔러 준 돈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안경과장을 끔찍이 생각했던 어머니는 그때도 두 누나들에겐 비밀이라며 신신당부를 하셨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 덕분에 아내 경은도 모르고 있다.
‘이자 그거 쥐꼬리만 한 거 있으나 마나 한 거지.
그래, 모쪼록 부자가 되려면 돈을 굴릴 줄 알아야 돼.
이참에 주식 접고 코인을 해볼까?’
‘코인'이라고 검색하자 ‘30대 400억 벌고 퇴사', ‘수익률 4500% 보장', ‘6개월 만에 대출 갚고 서울 아파트 구매'라는 솔깃한 성공담이 쏟아졌다.
안경과장은 눈을 빛냈다.
‘그래.. 코인, 이거네~! 이것만 터지면 주식으로 까먹은 거 회복하는 건 일도 아니겠는데?
일해서 돈 벌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들이 하는 거야.
나처럼 가만히 누워서 돈 벌 생각을 해야 진짜지.
그래, 이거야, 이거. 코인.’
‘400억 대박 나면 나도 조그만 건물이나 하나 사고~’
하루 종일 누워 있다 보니 우울한 생각만 들었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벌써 400억을 손에 쥔 것 같았다. 안경과장 입가에 비죽비죽 미소가 올라왔다.
‘역시, 사람은, 이 짱구를 잘 굴려야 돼. 엄마가 용-한 점쟁이한테 물어봤더니 나는 노년에 크게 잘된다고, 50부터는 사장님 소리 들으면서 남들한테 큰소리 떵떵 치고 살 거라고 그랬다잖아. 내가 지나가면 다들 고개를 꾸뻑 숙이고 눈도 못 마주칠 거라고.’
‘내가 지금 잠깐 쭈그러졌다고 딸자식 영어학원 그까짓 거 하나 못 보내겠냐. 남들은 조기유학도 보내는 판에.. 공부머리는 없어도 죽어라 시키면 영어 하나는 잘하겠지.’
‘그럼 나중에 중국 재벌이라도 꼬실지 어떻게 알아.’
‘뭐, 성형비는 많이 들겠지만.’
cover image: Photo by Danilo Capece on Unsplash
#안경과장 #과장 #회사생활 #코인 #수익률 #주식 #주가 #폭락 #폭등 #성공신화 #성공스토리 #후기 #비트코인성공후기 #킥보드 #영어학원
https://brunch.co.kr/@ellev/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