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레브 Oct 05. 2021

자존심이 상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인경과장 8편

“이 밤에 또 어디가!”

“돈 벌러 간다!”


미정의 생일에는 남편에게 5백만 원 상당의 목걸이를 받았다고 해서 집이 한바탕 난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결혼기념일이라고 가방을 받았다니.



현관문을 쾅 닫고 나온 안경과장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미정과 그녀의 남편을 떠올렸다. 한번 봐서 남편의 얼굴은 기억이 안 나고 미정이라는 여자도 인상이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그들의 차는 확실히 기억났다.


그 부부의 국산차와 자신의 BMW 520d를 비교했다.

‘국산차나 끌고 다니는 놈이…’

안경과장은 주머니 속의 차키를 만지작거렸다. 이대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생각할 수록 기분이 더러웠다.

안경과장의 자존심은 그의 아파트에서 나온다.

그의 자존감은 BMW에서 나온다.


그가 입고 있는 커다란 말이 새겨져 있는 옷과 구찌 신발까지 그의 자존감을 대변하고 있다. 혹여 신발 벗을 일이 있을까 봐 양말도 같은 브랜드로 신는다. 어디 가서 꿀릴 수 없으니까.


겨우 국산차 끄는 남자가 명품백을 살 수 있는데 자신이 못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됐다. 하지만 주식은 연일 떨어지고  신용카드는 모두 한도 끝까지 사용 중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배민이다.


사실 퇴근 후에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새벽 배송보다 라이더를 먼저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배달 고객과 얼굴을 맞대야 한다는 점이 망설여졌다. 자신을 ‘배달부’ 취급한다면, 만약 ‘갑’ 질이라도 당한다면, 자존감이 회복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안경과장은 같은 ‘갑'질이라도 비싼 곳에서 하는 걸 더 좋아했다. 돈 쓴 만큼 더 당당하게 갑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네 밥집에서 진상 부리는 건 구질구질해 보였다.


속으로 ‘저러니까 이런 동네 밥집이나 다니지.’라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정작 자신도 그 밥집에 앉아 있다 목격한 광경이라는 건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도 김밥집에서 늦게 나온다며 온갖 진상을 부려 환불받은 경험을 영웅담처럼 떠들고 다녔던 것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도 요즘은 비대면이 많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새벽 배송을 그만두고 배민 라이더를 하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는 건 몸이 너무 축났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배달할 것인가

새벽 배송을 할 때도 자신의 외제차는 기름값이 너무 들어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걸어서 하면 몇 군데 못 할 것 같고…’

허리가 좋지 않아 자전거는 진작에 옵션에서 지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결정한 것이 요즘은 장바구니 걸이로 사용되고 있는 전동 킥보드였다.


무게가 상당한 전동 킥보드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벽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제외하곤 나이에 비해 봐줄만한 것 같다.


거울에 콧김이 서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안경과장은 가느다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넘겼다. 요즘 들어 머리숱이 좀 적어진 것이 고민이다. 그래도 영국 차장에 비하면 자신은 괜찮았다.


‘쯧쯧, 영국이 자식, 요즘 아주 앞머리가 몽땅 날아갔더니만. 그 나이에 벌써 M자형 탈모면 끝났지 뭐’


그에 비하면 자신은 머리카락이 가는 편이라 숱이 더 적어 보일 뿐이다. 대기업 차장에 잘 나가면 뭐하나 대머린데. 안경과장은 드물게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정수리는 얇은 머리카락 몇 가닥으로 살짝 덮여 O자형으로 비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자세히 보니 요즘 새벽에 일어나서 그런지 피부는 좀 상한 것 같았다. 까슬한 턱을 손으로 쓸며 이리저리 얼굴을 비춰 보았다. 하품을 하며 눈꼽을 떼는 손가락에 낀 까르띠에 결혼반지가 반짝였다.


안경과장은 거울에서 한 발짝 떨어진 채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폈다.

얼마 전 김과장이 입은 걸 보고 급하게 산 몽클레르 패딩 사이로 말 로고가 커다랗게 찍힌 셔츠가 보였다. 습관적으로 왼손목을 털자 묵직한 금시계가 슬쩍 보였다.


당연히 전동 킥보드도 아무거나 사지 않았다. 유럽형 킥보드로 듀얼 모터가 달려 성능의 끝판왕이라는 브랜드 제품이다.


은색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꽤 만족스러웠다. 누가 봐도 ‘배달기사’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남들 눈에는 퇴근 후 동네에서 킥보드를 타는 여유를 가진, 돈 좀 있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안경과장은 어깨를 쭈욱 폈다.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가 가장 중요했다.

밀린 카드빚 때문에 배달을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혹시 배달 고객을 마주친다 한들,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몽클레르 패딩을 보고 오히려 상대방이 기가 죽으면 모를까.


띵동!

아파트 정문에서 핸드폰으로 ‘라이더 시작’을 누르자 운 좋게 콜이 바로 떴다. 정문 사거리에 있는 이디야커피에서 옆 아파트 롯데캐슬까지였다. 이 정도면 첫 배달로 적당했다.


양발을 킥보드에 올리고 오른쪽 출발 레버를 눌렀다.

지이잉.


- 계속


https://brunch.co.kr/@ellev/155

(커버이미지: https://unsplash.com/@martinkatle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