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애 키울 때 친정 엄마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 것 같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였을까? 어린 아이라 아무것도 모른다 싶어도 수시로 눈치가 빤해 보여서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곤 했었다. 그런 아이가 예닐곱 살이 되니 제법 속 깊어지는 게 느껴졌다. 엄마가 마음 아플까 봐 이야기 안 한다거나 아빠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큰아빠가 또 하고 있다는 것. 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실 때 작은 엄마의 사정이란 건 또 내 엄마가 작은 엄마의 몫까지 다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또 자기가 엄마 없이 불편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돌아가는 사정도 빤히 알고 '왜 우리만 해야 돼?'라며 볼멘소리도 할 줄 알았다.
어린것이 어떻게 그렇게 빤히 알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생각이 가서 꽂힌다. 물론 아이들이 상황에 따라 공감능력이 떨어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뭔가 불안할 때만큼은 정말 눈치가 빤 해 진다. 왜?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앉을자리. 자기 존재감에 대해서는 온몸의 세포가 열리는 것 같다. 부모가 싸울 때, 할머니가 내 엄마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할 때.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이 내려앉은 자리, 자신을 둘러싼 그 울타리들이 안전하고 따스한지, 위태로운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또 엄마가 자기를 동생과 차별할 때, 할머니가 아들이 아니라고 자신을 향해 대놓고 아쉬움을 표현할 때. 아이는 자신의 존재가치감을 논리적인 생각 이전에 공기로 느끼고 상대의 모든 비언어적 메시지를 느낌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여 자신에 대한 해석을 쌓아나갈 것이다.
아이들이 자기가 내려앉은 환경, 그곳에서 자신의 존재가치감. 그것들이 모두 안녕한지, 그렇지 않을 때 아이들은 그 집에서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해 서성이다 여전히 불안정한 채로 어른이 되어 그 집을 나올 것이다. 이미 그 집에서 신체적, 심리적 경험의 반복으로 그 사람만의 결이 만들어진 채로 말이다.
그렇게 보면 사람이 자신에 대해 느끼는 것.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내 생각은 어릴 때부터 그 두 가지에 대한 누적된 느낌과 경험으로 형성돼 왔을 것이다. 그리고 무섭게도 거의 평생? 삶의 대부분을 그 영향력 아래 살게 될 수도 있다. 오십이 된 나는 지금 어떠한가? 우선은 여전히 그 영향력 아래서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한다. 그래서 나는 나이만 먹었을 뿐 미성숙한 엄마였다. 미성숙한 상태로 정말 미숙한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그 중요한 두 가지 '앉을자리와존재감'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육아를 했다. 그러다 아이의 사춘기를 계기로 나는 온몸으로부모의 자리를 다시 배웠다. 그것도 반강제로. 그래서 아이를 웬만큼 다 키워놓고 뒤늦게 사람의 앉을자리와존재감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또 '앉을자리와존재감'을 위한 양육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뒤늦게 배운 양육의 자세를 나의 언어로 표현해 보자면 내 자식을 대함에 있어 '삼가(겸손한 마음.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의 자세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이걸 알았더라면 나의 사춘기 자녀 양육이 내가 치른 대가보다는 좀 덜하지 않았을까? 하긴 뭐 양육에 대해 가진 것 없는 채로 아주 탈탈 멘털까지 털리고 나니 한편으로 좀 억울한 것도 없지는 않다. 그래도 뒤늦게라도 남은 배움과 지혜가 있으니 그게 어딘가. 이제와 한탄해 본들.
여하튼 사람의 앉을자리와 존재감! 이건 평생 사람을 서성이게 하느냐 아니냐를 좌우하는 문제인 것 같다. 요즘도 내가 서성이나? 그래서 내가 이 문제에 꽂힌 건가? 오십이나 한 살이나 내 두 발 딛고 설 자리, 마음 편히 앉을 공간 하나. 그 자리 하나가 아쉬운 건 매 한 가지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