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국지색의 변명
자그마한 출판사를 운영할 때 출간했던 책이 <미인계_중국의 4대미녀>였다. 서시, 초선, 양귀비, 왕소군. 그녀들의 인생을 파헤치며 번역본들을 읽어가는 동안, 한편으로는 기구한 운명에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연속된 수동적 행보를 보며 현대인의 시각으로 답답해했다.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의 미색'.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나라를 망친 요부나 악녀를 떠올린다. 마치 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만큼 절대적인 힘을 지녔다는 듯이. 과연 그럴까? 역사는 종종 진실을 감춘 채, 가장 약한 고리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곤 한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꼬리 자르기'다.
춘추전국시대, 서시는 오왕 부차를 유혹해 오나라를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파견되었고, 이 일화는 미인계의 교과서적 성공사례로 기록되었다. 은나라 주왕과 달기의 악행 스케일은 그야말로 블록버스터급이다.
독사와 전갈 같은 맹독성 동물들을 깊은 구덩이에 풀어놓고 죄수들을 집어넣는 '돈분'을 만들어, 그들의 절규를 들으며 황홀한 밤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가학적 변태들의 극치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는 달기가 주도했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왕이 원하는 바에 맞춰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주왕이 시를 짓고 자연을 사랑하는 풍류 군주였다면, 감히 달기가 사람 죽어가는 소리를 BGM 삼아 밤을 보내자고 제안했을까?
간신이 무능한 리더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보는 것처럼, 경국지색이란 개념 역시 비겁한 왕들이 자신들의 실정을 덮기 위해 만들어낸 핑계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비겁한 왕들 중에서도 가장 교묘한 방식으로 경국지색을 탄생시킨 인물이 있다. 바로 당 현종이다.
무혜비가 세상을 떠나자, 현종은 자신의 아들 수왕의 아내, 즉 며느리 양옥환에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녀를 후궁으로 삼고 싶었지만 이는 명백한 패륜이었다.
이 딜레마를 '현명하게' 극복하고자 유능한 측근들과 함께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첫째, 아들 부부를 이혼시켰다.
둘째, 양옥환을 도교 사원인 태진궁에 출가시켜 여도사로 만들었다. 하루 종일 홀로 지내던 그녀에게 현종만이 유일한 대화 상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를 기다리다 사랑하게 되었다는데, 이것 역시 현종의 계산된 수순이었을 것이다.
셋째, 일정 기간 후 여도사 신분으로 '클렌징'된 양옥환을 궁으로 불러들여 귀비로 책봉했다.
넷째,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새 신부를 맞이하게 했다.
현종의 이런 '신분 세탁' 기법은 '내연녀를 합법적으로 곁에 두는 법'의 전설적 바이블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온갖 꼼수를 동원해 어렵게 만든 후궁을 끝까지 지켜내며 천수를 누렸다면 그나마 덜 비겁하게 기억되었을 텐데, 결국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녀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명했다. 양귀비의 위세에 편승해 방탕한 놀음을 벌인 오빠 양국충 때문에 안사의 난이 일어났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남매를 희생양으로 내놓은 것이다.
역사 속 '경국지색'들이 죽음을 맞아야 했던 이유는 그들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다. 황제들의 한결같은 패턴, 즉 미인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위로받으려는 집착! 그들을 이용하고 희생시킨 권력자들의 욕망과 비겁함 때문이다.
- 사족 -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혹자는 '미인은 그래서 단명하고 인생이 고달프다'며 평범한 외모의 사람들을 위로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혀 위로가 안 된다.
'확실한 미모'와 재능으로 성공해서 명품관 상품들을 쓸어담으며 우울증과 외로움을 달래는 힘든 인생은 어떨까? 라고 상상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