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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산의 큐피드

젤다의 전설 -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10)

by 김엘리

마구간에서 출발하기 전에, 비에 쫄닥 젖은 몸도 쉴 겸 해서 푹신푹신침대를 이용해서 한 숨 자고 출발했다. 마구간에는 일반 침대 외에도 푹신푹신침대라는 것이 있는데, 보통 침대보다 좀 비싸지만 이용하고 나면 원기를 훨씬 많이 회복한다고 하여 이용해보았다. 자고 일어났더니 평소보다 기운이 더 나는 느낌이었다. 시커 스톤을 확인해보니 생명력이 일시적으로 늘어났다! 돈을 더 많이 썼으니 당연한 건가 싶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매우 좋았다.


파란 하늘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필로네의 숲을 빠져나와 푸릇푸릇한 평원을 달려 동쪽으로 갔다. 말발굽 소리가 경쾌했다. 말이 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는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래사장이 펼쳐진 바닷가로 접어들어 신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소금기가 섞인 따뜻한 바람이 말갈기를 휘날렸다. 크게 심호흡을 하니 바다의 향기가 느껴졌다. 얼마만에 보는 바다일까. 알 수 없지만 상쾌했다. 그렇지만 마냥 좋아할 수 만은 없었다. 멀리 내다보이는 바다에는 몬스터들이 꽤 자리잡았고,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에도 키이스나 츄츄같은 몬스터들은 계속 덤볐다.


몬스터들을 피해가며 달리다 보니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언덕으로 달리는 말은 체력이 약한지 속도가 줄어들었다. 나는 말을 달래가며 일부러 속도를 늦춰 갔다. 산길로 접어든지 얼마나 되었을까? 눈앞에 아름다운 꽃밭이 펼쳐져 있는 것이 보여 나는 말에서 내렸다. 풀밭 가운데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을 중심으로 왠 키 큰 여자와 하일리아인 남자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내가 말에서 내린 곳에선 키 큰 여성이 더 가까웠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구릿빛 피부의 매우 건강해 보이는 그녀는 붉은 머리가 인상적이었고,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 들어보는 말을 내게 건넸다.

"사브아크."


무슨 뜻이지? 어리둥절한 내게 그녀는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다.

"네가... 나의 운명의 브오이인가?"


이게 무슨 소린가. 운명의 브오이??? 계속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내게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했다.

"... 그럴 리가 없지..."

그리고는 내게 다시 물었다.

"여기가 전설의 러브 폰드...맞나?"


... 러브 폰드? 뭐지... 그녀에게 러브 폰드가 뭐냐 물어봤더니 그녀는 그제서야 나의 떨떠름한 반응이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게 짧게 설명했다. 여기서 처음 만난 여자와 남자는 운명적으로 맺어지는 전설이 전한다고...


아무리 전설이라지만, 설마 그게 통할까? 그런 출처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믿고 온 거라고? 그럼 일부러 여기를 찾아온거냐고 물어봤지만, 그녀는 사실 나를 신경쓰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곁눈질로 한쪽을 슬쩍슬쩍 보며, 연못 건너편의 남자를 의식했다.


"연못 건너편에 이상한 브오이가 있을 뿐인데...정말 여기가 맞는 건가....?"


그녀의 말대로라면 '브오이'란 남자를 지칭하는 말 같다. 어느 지역 사투리인가? 그녀는 계속 주변을 서성이기만 하고 별 말이 없어서, 나는 연못 반대편의 남자에게 가보았다.

건너편의 남자에게 가서 '저기요' 하고 말을 걸었는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아, 안 돼! 저 사람은 내가 먼저 찾았다구!"


엥? 아니... 이 사람 뭐지...? 기가 차서 곯려 줄까 싶은 생각에 '라이벌이네요'라고 말해볼까 하다, 나는 꾹 참고 '그런 뜻이 아니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아... 그런 거예요...? 휴.. 다행이다..." 라고 하며 얼굴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을 내게 알려주었다.

"앗, 저는 와빈이라고 해요! "


그러더니 약간 부끄럽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저 길을 잃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요...문득 앞을 보니 이런 곳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성분이 계셔서...이건 대체 여우에 홀린 건지... 아니면 유령인지...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녀가 누구든 제 이상형임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러더니 결심했다는 듯 이렇게 외쳤다.

"그래서 마음 단단히 먹고 고백하려고 해요!!!"


처음 만나서 말도 못 붙여봤는데 고백이라고? 정말 여기가 러브 폰드이긴 한가보네...? 신기해서 나는 와빈을 다시 쳐다보았다. 겉보기엔 약간 쑥맥처럼 보였는데... 사람은 겉보기가 다가 아니라는 말이 맞는건가. 그 때 와빈이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저 그런데, 저는 운명의 상대를 만났을 때 은밀초를 주며 고백하려고 마음먹었거든요!"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며 매우 안타깝다는 듯 한탄했다.

"은밀초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가는 건데..."

그리고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나저나 저 분... 은밀초 이미지에 딱 맞지 않나요? 저는 하루 종일 저 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어요...!"


은밀초를 닮았다고? 나는 와빈의 말에 건너편의 여성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어디가 은밀초를 닮았다는 거야? 내가 아는 은밀초라면, 그 푸른빛이 도는 종 모양의.... 고개를 숙인 봉오리가 얌전해보이는 꽃인데.... 아까도 말을 붙여봤지만, 건너편의 여성은 당돌해보이고 힘도 세 보였....


와빈에게 저 여성의 어디가 은밀초같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와빈은 그런 나의 눈치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로 다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지만... 지금은 여자가 좋아할 만한 것도 없고... 하다못해 은밀초라도 있었으면...."

계속 은밀초 타령인 와빈을 보고 있자니 이 근처에는 은밀초가 없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한 눈에 들어오는 은밀초는 없어서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핫. 언제 내가 은밀초를 땄더라? 주머니에 은밀초가 떡하니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런데 와빈은 코가 아주 예민한가보다.

"그래요... 이런 향이 나는... 이런.. 향이..."


갑자기 정신이 든 듯한 표정으로 와빈은 내게 물었다.

"설마, 은밀초 갖고 있는 거예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와빈은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탁이예요! 그 꽃, 저에게 양보해 주세요!"


응? 양보를...?

따지고 보면 나에겐 당장 은밀초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와빈의 애절한 표정을 보니 약간 놀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주지 않는다고 하면, 이 녀석 완전 곤란해하겠지? 내가 가만히 있자 와빈은 두 손을 모으고 크게 인사를 하며 부탁한다. 그런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져, 나는 와빈에게 은밀초를 건네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그는 고개를 꾸벅하며 진짜 고마워했다.

와빈은 은밀초를 조심스레 집어넣더니 은밀초를 들고 고백하는 시늉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 이걸로.. 그녀의.. 심장을..."


나는 와빈에게서 등을 돌려 연못 건너편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아까처럼 계속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와빈이...

"쿵!!!!"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뭐지? 하고 돌아보니 와빈은 아주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아아.... 역시 안 되겠어....그녀를 보면... 발이... 얼어...붙어서...."


아까의 그 고백하겠다던 기백은 어디 갔냐고 와빈에게 물었다. 와빈은 더욱 부끄러워했는데, 어쩔 줄 모르는 와빈의 모습에 나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와빈은 나를 보고 간곡히 부탁했다.

"...정..정말...죄송한데요... 이 꽃을... 그녀에게 전해 주실래요...?"


뭐라고? 나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풋 웃었다. 와빈은 하지만 나의 웃음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뭐야 이 녀석... 역시 처음에 받았던 나약한 인상대로인가... 귀찮은데... 그렇지만 와빈의 얼굴이 계속 난처한 표정이라, 나는 알았다고 해 버렸다.


"고맙습니다!!!! 이 은밀초는 돌려드릴게요."

와빈은 내게 다시 은밀초를 건네주더니, 신신당부했다.

"앗, 제가 보낸 선물이라고 꼭 전해 주시고요!"

와빈의 우렁찬 감사의 말을 뒤로 하고, 나는 연못 건너편에 서 있는 빨간 머리의 여성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뭐야?"

"저... 남자 분이 보냈습니다."


나는 연못 건너편에 서 있는 남자 쪽을 손가락으로 슬쩍 가리켰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저 남자분은 당신이 이상형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이것을...."

나는 그녀에게 은밀초를 건넸다. 그녀는 은밀초를 보자마자 의심을 풀고,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호오...이 꽃을...저 브오이가....?"


그녀는 은밀초를 한참 들여다보고, 건너편의 남자를 보더니 턱에 손을 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거짓은... 아닌 것 같군..."


내가 다시 와빈 쪽으로 걸어가자 그녀는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는 와빈에게 말을 걸었다.

"이 꽃을 보낸 게 너야?"

그런데 와빈은 그녀의 약간 거친 말투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잘못했다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와빈의 엉뚱한 대답에,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잘못했다고 하면 어떡해!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와빈은 그녀의 눈치를 보더니 겨우 이렇게 한마디 건넸다.


"혹시... 은밀초 싫어... 하시나요?"

와빈은 그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그런데, 그런 와빈의 말에 그녀는 아주 힘차게 대답했다.


"싫어할 리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그런데 어째서 네가 알고 있지...? 설마 스파이나... 적인가?"

"흐아아.. 아닙니다, 아니예요!"

와빈은 손사래를 치며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은...은밀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꽃입니다...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이 꽃을 줄 거라고 마음 먹고 있었던 거라서요... "


그녀는 '운명'이라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그러더니 결심한 듯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것이 운명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네가 운명의 브오이로군? 좋아, 응수해주지. 그럼, 다시 한 번 말해 봐!"

"네?"

"네?- 가 아니라, 브오이가 브아이에게 보내는 말 있잖아!!!"

"네?"


와빈이 눈치를 채지 못하고 계속 되묻자, 결국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와빈을 가르쳤다.

"좋아해, 라던가 사귀자-라던가 그런거 말이다!"

그 말에 와빈은 얼굴이 빨개지며,

"..아 네넵!! 고맙습니다!!! 물론 저는 좋습니다!" 라고 답했다.

그러더니 와빈은 나를 보며 보며 신나서 말했다.

"저, 방금... 들으셨어요? 저 고백 받았어요! 생애 첫 고백을 운명의 상대에게 받다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흑.... 태어나길 잘했어..."


와빈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처음에는 본인이 고백하겠다고 했는데, 완전 주객전도인데다가 생각보다 심약한 와빈과 굳센 그녀... 앞으로도 두 사람,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와빈과 여성을 번갈아 봤는데, 와빈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당신께는 어떻게 감사해도 모자라네요... 이건 제 마음입니다..."

와빈은 내게 빨간 루피를 내밀었다. 20루피였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여자가 갑자기 화를 냈다.


"뭐야, 그 금액은?! 나에 대한 마음이 그런 푼돈밖에 안 된다고?"

그 말에 와빈은 당황하여 용서해 달라고 하더니 은색 루피를 내게 쥐어주었다. 100루피! 아핫... 이거 큐피드 역할 하는 것도 꽤 쏠쏠하네. 돈을 치루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흡족한지, 그녀는 갑자기 나를 보고는 축복의 말을 건넸다.

"거기... 너! ... 나는 페디라고 한다... 너에게는.. 그, 뭐... 신세를 졌다! 너에게도 나같은 멋진 브아이가 나타나기를 기도한다."


서로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는 듯한(?) 커플의 모습을 보던 나는 돌아서서 가려다가, 와빈에게 "잘 해봐." 한마디를 건넸다. 처음엔 좀 귀찮다고 생각했지만, 재미있는 구경이었다. 러브 폰드의 전설이 정말로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커플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떠나려는 내게 와빈이 다가와 이렇게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저.. 근데 이번 일로 감사하긴 한데요, 120루피 드린 것은... 제게는 좀 무리거든요.. 일부라도 좋으니 돌려 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였다. 와빈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어왔다.

"무슨 소리야! 너! 여기까지 다 들리거든?!"

약간 실망한 듯한 페디는 쐐기를 박았다.

"브오이라면 한 번 뱉은 말은 끝까지 지켜야지!"

"아...네네...!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무서운 페디였다. 두 사람, 정말 운명의 만남이 맞겠지? 페디의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허허...


나는 와빈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고는 러브 폰드를 등지고 산 아래를 보았다. 정면 아래 언덕에 빨간 불빛이 들어와 있는 사당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은 어촌이 보였다. 아마도 저기가 나크시 마을이겠지! 사당에 먼저 들렀다 나크시 마을로 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자!


나는 그렇게 운명의 커플을 남겨두고 산 아래로 패러세일을 펼쳐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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