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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현 Apr 26. 2020

미국 출산, 그 견고한 3단 장벽

코로나 초절정, 미국에서 출산하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낯선 곳에서 어색한 공기를 들이쉬며 어리바리한 모습을 내보여야 하는 '취약한 상태'  자신을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웬만해선  낯선 환경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다. , 피할 수만 있다면야 최대한 피해서 멀리멀리 돌아서라도 가고 싶다. 어릴  전학  학교에서의 첫날 교실 분위기,  학년이 시작되고 나서  교실에 들어선  펼쳐지는 10분의 풍경이 그러했다.


서른넷,   만큼  성인에게도 낯선 타국에서 새롭게 살아간다는 미션은 불편한 중압감,  자체였다. 결혼 이후, 유학생활이 펼쳐친 이곳 미국 보스턴에서의 하루하루는 때때로  길고도 더뎠다.  그런 척하고 싶지만 사실  어렵고 불편했다. 한국에서는 눈감고도 잘할  있는 일들인데, 이곳에선 밤을 새워 연습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어'라고 읊조리는 날들이 꽤나 많아지던 날들. 자이언티의 히트송 '꺼내먹어요' 노랫말  자락이 들려오는 . "(미국) 집에 있는 데도 (한국)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은 기분?


타국에서의 임신 출산은 이 취약한 나의 상태를 올곧이 더 자주 내보이게 하는 데 제대로 한몫을 했다. 임신 초기부터 후반기, 출산 직후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보니 나 스스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른이 되었다는 건, 힘들어도 괜찮은 척, 어려워도 익숙한 척,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럭저럭 괜찮은 척하는 것. 이런 '척' 놀이에 익숙해지는 걸 텐데... 척할 수 없는 임산부의 삶. 어려운 건 어렵다고 불편한 건 도무지 싫어 죽겠다고 소리쳐야 하는 지경에 이르러버렸다. 미국에서 가로막힌 몇 가지 장벽 앞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시무룩해야 했던 순간들. 그 세 가지.


심한 입덧 속, 한국 음식에 가로막힌 벽

 입덧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람 바이 사람이라지만, 정말이지 난 극심한 입덧 지옥을 경험했다. 주변 또래 선후배 친구들은 '입덧 하나 없이 엄마에게 건강히 와줘서 고마워'와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하던데, 나는 정반대. 나중에 아기랑 재잘재잘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이렇게라도 농담을 해야 할 것 같다. "엄마에게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입덧 말이야... 엄마 좀 힘들었다(?)".


그만큼 격렬한 속앓이로 이른 아침, 늦은 한밤중, 가리지 않고 음식거리들을 그대로 알알이 뱉어내야 했다. 게워낸 만큼 마음에 쏙 드는 음식으로 빈 속을 든든히 채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한국 정반대 편, 이역만리 타국의 땅에서 어디 그게 쉽겠는가. 아무리 한식당과 한인마트가 있다고 해도 엄마 손맛 깃든 평범한 한국 밥상의 맛을 경험하는 건 그저 호화스러운 상상에 불과하다.


이 병동에 누워 배달앱 켜고 한국식 치킨을 주문할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의 흔한 음식 배달 앱 서비스. 이곳에서도 유사한 배달 서비스들이 생겨나고는 있지만 그렇게 선택 폭이 넓지는 않다. 배달자에 대한 팁과 자체 배달료까지 지불하다 보면 어느새 늘어나는 금액이 상당해서 '이럴 바엔... 그냥 참고 말지' 체념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배달에 관한 만큼은 한국이 진정 그립다. 떡볶이가 당길 땐 학창 시절 그 추억의 가게에서 떡볶이를! 요즘 핫하다는 그브 런치 식당에서 잘 나가는 메뉴 한 접시를 바로 원클릭 결제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할 때 딱딱 주문해서 입덧으로 인한 속앓이를 시시각각 달래고 임산부만의 '남다른 식욕'을 채울 수 있었다면 원 없이 신났을 텐데! 상상만으로도 후련한데! 친정엄마가 원 없이 담뿍 담아주는 맨질맨질 흰 쌀 밥이 그립고, 평범하고 소박한 반찬 몇 가지가 그리워도 여전히 그 모든 그림은 내게 '벽'에 가로막힌 환상에 불과했다. 임산부의 먹는 욕심을 채우는 일이야 말로, 가장 원초적인 욕망에 대한 장벽. 타국 출산이 가져다주는 첫 번째 '한숨' 그 자체.

너와 마주하는 첫 공간이 미국 아닌, 한국이었다면!
코로나에 가로막힌 친정/시댁 찬스의 벽

요즘엔 대부분, 출산 이후 산후조리원으로 향하는 게 일반적이다. 조리원 퇴소 이후엔 산후조리사 이모님을 집으로 모셔와 약 한 달가량 넉넉하게 '엄마의 진짜 휴식'을 추구하는 게 이상적이라고들 이야기한다. 출산 직후의 초보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집도 행복할 수 있을 테니 이런 플랜, 생각만 해도 평화롭다. 여기에 덧대어 친정의 정서적인 지원, 시댁의 센스 있는 지원 이모저모가 함께 곁들여질 수만 있다면, 꽤나 안정적인 '친정 찬스'와 '시댁 찬스'를 누렸다고 할 수 있겠지.

찬스 없는 극한 육아체험. 일단 커피 한잔부터 마시겠습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와 타국에 살면... 아니 미국의 지금과 같은 '코로나 시국' 속에 살다 보면 이같이 '일반적인' 한국 산모들의 산후조리 문화를 가까이하기 쉽지 않다. 일찍이 친정과 시댁의 산후조리 찬스를 득템 하기로 계획되어있었으나, 갈수록 심각해지는 코로나바이러스 발발 상황은 크고 두꺼운 장벽을 또 한 번 견고하게 만들어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도, 한국에서 미국으로도, 움직이려 하는 모든 발걸음에 제한이 생겼고 결국엔 양가 부모님이 집안의 첫 손주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시려던 열의에도 '장벽'이 생겼다. 보스턴까지의 직항 편이 잠정 중단되고 출입국자에 대한 2주 격리 의무규정이 생겨나고.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


산후조리? 집에서 부부 둘이 합니다


양가 부모님 오시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격 제법 상당한 국제 항공택배로 정성담아 보내주고 계신 상황. 집안의 첫 출산, 딸을 무한정 아끼는 마음에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택배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부모님. 결국엔 또 달리 변형된 형태의 부모님 찬스가 생성되고야 말았네?

아마도 한국에 있었다면 아기 빨래도 친정 찬스?
타국에서 친정 찬스는 이렇게 EMS 택배로 짠짠


같은 땅, 같은 타임라인에 머물고 있었다면 부모님도, 갓 부모가 된 우리 부부도 좀 더 편안히 새 생명의 탄생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꼬물꼬물, 첫 손주의 예쁜 배냇짓을 보시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가끔은 타국에서의 고단함 다 내려두고, 그저 맘 편히 누린다는 '친정 찬스', '시댁 찬스(?)' 맘껏 누려보고 싶어라. 그 누리지 못하는 장벽, 와장창 깨뜨려 부수고 싶은 마음은 점점 간절함만 더해가고.


종종 도착하는 친구의 응원 택배도 친정 찬스만큼이나 힘이 나지


벽이 아닌 듯, 결국엔 벽이 되는 언어의 장벽

그래, 이미 알고 있었다. 한국에서 유학 준비를 하면서도, 유학생활을 본격 시작해오면서도, 나의 영어가 결코 완벽하지 않았음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나만 그런 거 아니겠지?) 누구나 늘 비슷하지 않나. 어릴 때부터 대학에 가고 직장생활 10년을 해오도록 '영어'는 늘 어려웠으니까. 자꾸 더 잘하고 싶은 대상이었으니까. 대학원 수업을 익숙하게 잘 따라가기 위해 나날이 읽고 외며 발표 준비하고, 과제 한번 잘 내기 위해서 검토하고 또 검토하는 게 임신 출산 이전의 나의 흔한 일상.


근데 이거 기분 탓일까. 출산이 임박해오면서 언어적 감각과 내 안의 자체 표현능력이 서서히 감퇴되어가던 느낌. 생애 처음 겪을 고통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표현능력이 실제로 둔해진 건지, 한국어든 영어든 전반적인 언어적 반응이 더뎌지고 있음을 체감했다. 스스로도 답답한 순간이 꽤나 많아지고 있었으니... 나 떨고 있니?


이곳이 그냥 한국병원이었다면 내 마음은 열 배는 더 편했을 텐데?


병원에서는 내 현재 증상에 대한 상태를 정확하고 빠르게 표현해내야 한다. 대충대충 알아듣고 적당히 넘기는 소통이 불가한 곳이 바로 병원. 지금 고통의 크기를 1에서 10까지의 숫자로 표현한다면? 지금 배의 통증 느낌은? 찌르는 느낌, 둔탁하게 두드리는 느낌, 그냥 묵직하게 단단한 느낌,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이 쏴하게 쿵쾅쿵쾅 밀려드는 고통? 고통을 표현하는 일은 한국어로든 영어로든 참으로 어려웠다.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나 얼마나 아프다고 말할 일이 거의 없었다.)


잠시라도 멈칫거릴 땐 옆에 있던 남편이 혹시나 내가 이해하지 못했나 싶어 한국어로 통역을 해주곤 했는데... "나 못 알아들은 거 아니거든? 뭐라고 말해야 될지 한국어로도 잘 모르겠거든?" 아,,, 임신과 출산이 가져다준 언어의 장벽. 워낙에 격하디 격한 '결정적 상황'들을 마주하다 보니, 모국어로조차 내 상태 표현하기가 쉽지 않던 순간들. 답답하다 답답해.


출산 임박, 내 언어 표현 능력은 왜 자꾸 무뎌져만 가는가
타국에서의 병원신세, 늘 어느 정도의 떨림과 불편을 동반하는 것.


그리고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린 또 하나의 장벽이 있었으니, 미국 출산이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몰라도 되었을 영어단어들. 임신 초기에는 이 역시 차갑고 독한 기운 내뿜는 것만 같던 얄미운 장벽이었다. 이를테면, Episiotomy, Cervix, Enema, Pitocin, Vacuum extraction, colostrum, Hemorrhoid에 이르기까지... 인지해두고 자주 언급해야만 하는 생소한 단어들이 꽤나 많았다. 인종과 국적을 떠나 출산 이후, 일단 나도 '살고 봐야 했으니'! 자연분만 이후 찾아오는 각종 증상들에 대해 조치를 잘 취하고자 의료 전문용어에 대한 표현 장벽을 깨야하는 건 필수 중의 필수였다. 한국에서였다면, 출산 직후 산모의 예민한 통증에 대해 좀 더 초. 예. 민. 하게 따져 물었을 것 같은데, 내 언어적 표현의 역량이 최고치에 미치지 못한 탓으로 난 늘 나의 증상을 모호하게 둥글려서 우회적으로 표현했던 것 같다. 타국 산모의 한계다. 더 섬세하고 은밀하게 따져 묻지 못했음이 여전히 아쉬울 뿐. 오호통재라. 이거 정말 장벽 중 장벽이었네.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식생활의 장벽. 출산 후, 친정/시댁 찬스를 여왕처럼 누리지 못하는 장벽. 그리고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훅 찾아오곤 하는 반갑지 않은 언어의 장벽. 때때로 이런 삼종세트 벽을 마주해야 할 때마다 시들시들 지쳤고, 스스로의 한숨에 답답했음을 고백한다. 새 생명과 함께 하기 위한 인생 최대의 이벤트가 어찌 쉽게 쥐어질 수 있겠냐마는 모국에 비하자면 타국에서의 경험들은 '힘듦'을 감당해야 하는 '벽'이 높았고 그때마다 그 벽은 좀 더 까칠했고, 때때로 그 거친 촉감에 팔다리가 까지기도 하는 험난함을 동반했다. 다시 해볼 수 있겠냐고 누군가 조심스레 물어온다면, 나는 이 세 가지 장벽에 대한 회상만으로도 고개를 휘휘 내저을 것만 같다.


“아니오. 또다시 그 벽에 부딪칠
자신이 없어서요."


장벽과 마주한 뒤 이에 대한 후 처치법은? 벽 앞에서 주저앉아 스트레스받지 말기. 그냥 그러려니 하며 내 앞에 높이 벽을 기대고 앉아한 템포 쉬어가기. 벽의 까칠함에 놀라지 않기. 하나도 가다듬어지지 않은 야생 벽이든, 조금은 상처 덜 받기 좋게 생긴 매끈한 벽돌벽이든, 언젠간 내 적응력에 순화되어 맨질맨질한 벽이 될 거라고 믿어보기. 세 가지 장벽을 마주해야 했으나 무사히 그 장벽을 넘어 생애 중대한 이벤트를 마무리 지어냈으니, 어쨌든 미션 성공. 임신 출산이든, 그 외 삶의 이슈와 관계되어서든 장벽이 높아 한숨 쉬는 자들에게 조금은 위안이 될 수 있으려나. "나도 해냈으니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류의 글을 쓰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꾸역꾸역 잘 해내고야 만 '코로나 초절정 시국 속, 미국 출산'.


코로나바이러스 초절정 시국, 네가 이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디딘 순간


그 해 봄은 참 잔인했었어. 온통 바이러스로 가득 찬 세상에 출산하러 가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불안 초조했던 마음이 잦아들고 바이러스 단어를 꺼내지 않아도 될 만큼 진정된 시국이 찾아든다면 이 출산기는 내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1년 뒤 아기의 돌 무렵엔 이 긴박한 임신 출산기가 한결 편안한 추억처럼 기억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이 모든 긴장감을 떨쳐내고 아련한 기억만을 남길 수 있을지 새삼 궁금해진다. 그해 봄날은 정말이지 난리 난리도 아니었어. 그래도 엄마가 엄마 정신으로 해냈다니까? 너에게 조곤조곤 이야기 들려줄 그날을 기다리며.


내년 이맘때쯤 네가 발 디딜 공간은 부디 유쾌하고 밝은 세상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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