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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A하는 아나운서 May 25. 2020

태명을 잘못 지었나 봐

좌충우돌, 미국맘 성장기

부모와 아이가 처음으로 소통하는 순간은 어디에서부터일까. 테스트기에서의 존재감 확인. 첫 초음파 사진을 손에 거머쥐었을 때, 그 설렘의 순간. 첫 태동에 감격했던 그 찰나. 수많은 지점들이 있겠지만, 나는 단연 남편과 내가 한 마음으로 같은 입모양을 하고 웅얼거렸던 그 순간을 꼽아보려 한다. '태명'을 짓고 그 호칭어를 내내 입에 길들이기 시작했던 순간. 예비 엄마와 예비 아빠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고 있는 별칭을 지어내고 입에 착 달라붙도록 일련의 연습시간을 보낸다. 태어날 그 최후의 순간까지 아기에게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가장 간편하면서도 특별한 방법. 아직 세상과 마주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너의 얼굴이 아른거리는 것만 같은 설렘 폭발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해소해낼 수 있는 소통 비책. 태명을 지어 붙인다는 것은 실제 이름을 붙여 출생신고를 하는 것만큼이나 값진 가치를 지닌다.


궁금해요! 저를 뭐라고 불러주실 건가요?


태명에도 부모의 취향과 결이 담긴다. '건강하고 씩씩하게만 태어나다오'라는 심경이 최우선이라면 씩씩이, 혹은 튼튼이. 엄마 뱃속에 있는 동안 무탈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찰떡이', 특정 여행지와 인연이 닿은 아기라면 해당 지역명을 담아 '롬이 (로마)', '프랑이 (프랑스)', '모리 (모리셔스)'라고 별칭을 지어내기도 한다. 평소 자주 쓰는 부사어나 감탄사가 있었다면 그걸 태명 삼아 입에 올리기도 하며,  부부가 함께 좋아하던 작가나 가수 이름, 애정 하는 음식의 별칭, 단골 레스토랑의 약자를 따내어 이름 붙이는 것도 방법. 약 아홉 달 이상의 기간 입가에 머물 두세 음절, 신중하게 진심을 담아 골라야 한다.


뚝딱. 국어사전 정의에 따르면 '일을 거침없이 손쉽게 해치우는 모양'을 뜻한다. 우리 부부는 '뚝딱이'라고 호칭하며 아기와의 첫 소통, 그 물꼬를 텄다. "저 사람 일처리를 참 '뚝딱뚝딱' 잘하네.", "어머, 밥 한 그릇을 벌써 '뚝딱' 비워냈구나." 누군가가 망설임 없이 시원스럽게 미션을 완료해 냈을 때 자주 쓸 법한 부사어.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뚝딱'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도 담겼고, 더불어 태어난 뒤에도 무슨 일이든 '뚝딱뚝딱' 잘 해내는 만능 재주꾼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짐짓 반영됐다. '뚝딱'이란 단어를 품고 있다면 어느 경우에든 망설이지 않는 성향일 테니 어쩔 줄 몰라 지체하는 경우가 없을 것 같았고 고로 기민하며 재빠른 몸짓을 내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곰보다는 여우 쪽에 가까울 것만 같다는 생각도 함께.


사람 각자가 품고있는 기운과 자태에는 어울리는 이름이 있는 법. 자칫 성급히 명명했다가는 영 그 사람 본연의 색채와 안 어울릴 지도 몰라서 조심스럽다.
여보. 아무래도
우리 태명 잘못 지은 것 같지 않아?



태어난 지 어느덧 46일 차. 이상하게 열 달 가까이 지어 불렀던 태명이 입 밖으로 시원스럽게 터져 나올 생각을 않는다. 오히려 너무 작고 작은 몸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기에 '쪼꼬미'라는 새 별명을 달고 자주 부르고 있는 요즘. 물론 매사추세츠 주에 출생신고를 하며 아기의 공식 영어 이름도 생겼고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한국 이름도 생겼다. 이제는 예전의 별칭 대신 '진짜 이름'을 불러주면 될 일. 하지만 1년 가까운 시간 정들었던 태명이 점차 멀어져만 가는 게 제법 섭섭하다. 그래도 어쩐담. 왠지 '뚝딱'이라는 부사어에 함축된 의미는 우리 아기의 성향, 몸짓과는 영 안 어울리는 느낌이다. 맞지 않는 옷을 오래 입혔던 것 같다는 느낌? 아기의 자태와 미소에 한참 길들여진 뒤에야 깨달았다.


맘마 먹을 시간이 한참 지나도 웬만해선 잘 울지 않는 성향. 신변에 불편한 요소가 감지되더라도 엄마 아빠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눈만 끔벅끔벅하고 있는 얌전한 자태. '뚝딱'이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호탕함, 민첩함보다는 '순하다, 단정하다, 조용하다'와 같은 형용사로 묘사하기 좋은 우리 아기의 몸짓들. 겨우 50일도 안된 아기이지만 잠깐잠깐의 비언어적 행동들에서 '뚝딱뚝딱' 보다는 '가만가만한', '차분한' 자태를 더 자주 엿보고야 말았다. 눈망울은 크고 또렷하지만 '똘망똘망', '초롱초롱'이 품고 있는 재빠름의 요소보다는 '꿈뻑꿈뻑'이라는 단어에 담긴 느림과 망설임의 모양새가 더 많이 담겼다. 천천히 끔뻑거리는 큰 눈동자는 때때로 아련함과 애잔함도 품는다.


너의 몸짓을 색깔에 빗대자면 연두색, 연분홍색. 한없이 곱고 여리여리한 느낌이 잔잔하게 배어있거든.


태명을 색깔로 표현하자면, '뚝딱이'라는 별칭은 오렌지 빛과 레몬 빛의 활기를 색으로 품는 것만 같다. 반면 여태껏 곁에서 지켜본 우리 아기의 몸짓과 태는 연두와 연분홍의 기운이 스며 나온다. '또랑또랑'보다는 '여리여리' 감성에 더 가깝지 싶은 아기. 태명은 된소리를 활용해서 많이들 짓는다는데 아무리 생각하고 되뇌어도 똑 부러지는 입모양으로 다소 '세게' 발음되는 된소리 발음의 별칭은 잘 안 어울리는 것만 같잖아. 역시 사람이 품은 자태와 몸짓, 그 전반적인 기운을 잘 관찰한 다음에 이름을 얹어야 찰떡궁합을 만날 수 있는 법인가 보다. 다행히 아기에게 생긴 진짜 이름에는 지금의 이미지와 기운이 잘 실려있다. 연두색과 연분홍색이 뿜어낼 것만 같은 여리여리한 감성도 담겼고 그 안에 단정하고 차분한 느낌도 스민다.


엄마, 내 태명은 뭐였어?


언젠가 아기가 자라난 뒤 나와 수다 수다를 나눌 날이 다가온다면 언제라도 찾아들 질문. 내 태명은 뭐라고 지었었어? 왜 그렇게 지었었어? 아빠가 지었어? 엄마가 지었어? 쉴 새 없이 물음표를 이어가겠지. 조곤조곤 설명해주고 난 뒤 뒤돌아 서서 작명의 뒷 이야기를 가만가만 나 혼자 곱씹을지도 모르겠다. 이상하게 네가 태어난 뒤로는 도무지 태명이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뿐이었어. 한낮의 햇빛 속에서 네가 내보이는 여리여리한 몸짓, 꿈뻑꿈뻑 단정하게 천천히 내리누르는 네 눈빛은 된소리나 거센소리에 담기기에는 한없이 부드럽고 연하다는 생각뿐이었거든.


"여보, 아무래도 우리 태명을 잘못 지은 것 같아. 좀 더 부드럽고 연한 소리를 담아볼 걸 그랬지?" 아기가 잠든 새를 타서 지난 태명에 대한 볼멘소리 잔뜩... 그러고 나서 다시금 깨닫는다. '괜찮아. 태명은 태명일 뿐. 그렇게 제 역할을 똑 부러지게 하고 떠나갈 운명을 타고난 거니까. 새로운 이름과 그에 실린 기운으로 아낌없이 사랑해 줄 준비가 되어있으니까.'


너의 기운과 꼭 닮은 이름을 찬찬히 공들여서 불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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