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은 NO. 뭔가 남다른 '뉴노멀맘' 지향기
평범함은 NO. 뭔가 남다른 '뉴노멀맘' 지향기
모처럼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 플레이리스트를 꺼내 듣는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테라스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격하다 싶을 만큼, 쨍쨍 내리쬐는 햇빛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는데 마음에도 반갑게 물방울을 톡톡 던져주는 느낌. 정말이지 반갑다. 이게 얼마만이야. 한국에는 본격적인 '장마 시즌'이라는 게 있는데 뉴잉글랜드 지방의 날씨는 그저 단순하고 심심하다. 겨울엔 엄청나게 춥고 여름에 또 미국 남부 못지않게 더운 느낌? 비가 자주 찾아들지 않는 따분한 더위. 그러던 중 내리는 단비. 이 순간을 놓칠 순 없지. 비 오는 날의 감수성을 노래 몇 곡 위에 사뿐히 얹어두기.
빨래를 해야겠어요.
오후엔 비가 올까요.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요.
이적의 '빨래' 도입부 한 대목. 느릿느릿, 뭔가 터져버릴 것 같은 한숨을 한 가득 참아내고 담담하게 부르는 듯한 느낌이 차분한 잿빛 날씨에 더없이 제격이다. 비 오는 날 이적의 ‘Rain’ 못지않게 자주 재생해두곤 하는 이 노래.
빨래라는 게, 옷에 켜켜이 묻은 때를 탈탈 털어내는 더없이 현명한 작업인 것처럼 비를 맞이한다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빗소리가 들릴 때면 왠지 마음을 곤란하게 만들어 온 피곤한 자국들까지 어느새 잘 씻겨질 것 같은 착각이 드니까. 해가 반짝 드는 때에 빨래를 맞춰해야 옷감들이 바삭하게 잘 마를 텐데 싶어서 비가 온다는 예보가 든 날엔 노랫말처럼 마음이 조급해진다. 물론 실제 이 노래에서 빨래를 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긴 하지만.
그런데 말이지. 오후에 비가 오면 빨래를 지금 미리 해야 해? 이 좋은 노래를 듣다 말고 참 괴짜스러운 생각이 번쩍 들었다. 요즘 들어 유학 라이프에 육아가 겹치면서 '번아웃 증후군'이라도 찾아든 걸까. 괜히 내 오랜 힐링쏭에까지 소소한 딴지를 걸고 싶어 진다. 이별한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는 마음을 '빨래'에 담았을 뿐인데, 한창 육아맘인 나는 그저 '빨래를 지금 어서 해야 한다'는 말만 맴맴 돌아서는, 심술이 났다. 그냥 비가 다 시원하게 내려준 다음에 아주 천천히 시작하면 안 될까. 꼭 비 내리기 전에 다 해둬야 해?
미국 대학원 유학생활 2년 차. 돌아보면 난 미리 빨래해두는 삶을 살았다. 4월 말엽 마감인 보고서를 1월 중순 무렵부터 쓰기 시작하고, 중간고사가 3월 초라면 2월 중순부터는 주어진 강의록 1회독에 들어가야 마음이 진정 놓였다. 한국에서 학부시절을 보낼 땐 각각 일주일, 하루 이틀 벼락치기면 됐을 일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 보니 자연스레 프로젝트를 완성해내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이것만이 최선이지 싶었다. 미리 해두는 것만이 험난한 타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본 생존 전략 중 하나.
수업계획서에 적힌 커리큘럼에 따라 미리 수업자료를 꼼꼼히 읽고 궁금한 사항들, 핵심이 되는 부분들을 체크한 뒤 몇몇 문장들은 아예 통째로 외워버리고 내 안에 넣어두려 애썼다. (물론 외운다고 해도 금방 잊어버리기에 자꾸 반복만이 필수). 비오기 전에 미리미리 바지런 떨며 빨래를 하듯이 난 참 호들갑 떨며 수업을 들었다. 곁에 있는 원어민 친구들이 어리둥절할 만큼 나 혼자 참 바빴다.
비 오기 전에
미리미리 빨래를 하듯이
참 호들갑 떨며 수업을 들었다
미리 '빨래하듯이' 보내는 유학생활. 한 학기 한 학기 지내 보내고 나서야 이제 와서 과하게 부지런했던 내 습관들에 괜한 심술이 나기 시작한다. 만약 그냥 '빨래 밀리듯' 살았어도 제법 그럭저럭 생존해내지 않았을까. 인터내셔널 학생이니 당연히 영문 해독 속도가 느릴 거고 과제의 속도감도 당연히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것을. 그 어찌할 수 없는 한계점을 교수님도 동기들도 알 텐데, 난 조금이라도 빨래가 밀리는 게 싫은 사람처럼 조급하게 굴었다. 때로는 빨래가 밀려서 옷감 통에 보기 싫게 쌓인다고 해도 어쨌든 언젠가는 '해결이 되곤 하는 숙제'가 아니던가. 오후에 해가 비치지 않을 것을 대비하는 마음으로 과제를 미리 했고 조 프로젝트를 빨리 마무리짓자고 같은 조 팀원들을 재우쳤다. 빨리하자고 빨리하자고.
호기롭게 빨래를 미뤄두는 여유를 가져보고 싶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을 마주한다고 해도 "이것도 해야 돼, 저것도 해야 되는데?" 하며 수많은 '투두 리스트' (To do list) 속에서 마음을 쪼그라들게 하기보다는 정반대의 평평한 여유를 널어두고 싶어졌다. "안 되면 비 온 다음에 이따가 하면 되지." 스스로에게 숨 쉴 시간을 줄 수 있는 여백. 빨래도 하루 걸러 하루 해도 되는 거잖아!
격일로 천천히 빨래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조급했던 삶.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접하면 더 급하게 서둘러서 오전에 모든 빨래를 다 미리 끝내 두고 싶어 했던 유학 라이프. 나는 그런 원칙 안에서 혼자 참 숨이 찼다.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더 많이 더 빈번히 빨래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하루하루의 순간들. 그냥 나중에 빨래하듯이 미뤄두듯 편안히 유학에 임해볼 걸, 다 지나고 나서야 조심조심 되새겨본다.
겨우 한 학기 남겨둔 미국 대학원 생활. 이제 와서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게 쉽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비 오는 풍경' 속에 '미국 유학에 임하는 마음가짐 10가지' 류의 리스트를 하나하나 띄워 올려본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래에 덜 조급한 자세로 남은 시간들을 보내볼 수 있을까.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까짓 거, 그럼 다 그치고 나서 빨래하면 되지.' 식으로 어디까지 느긋해질 수 있을 것인가 새삼 궁금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되새기던 중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 다음 흘러드는 선곡은 아이유가 부르는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으아악, 제목부터가 앞으로의 모든 날들을 또다시 암시해주는 것만 같네... 역시나 다음 학기도 미리미리 과제하고 팀 프로젝트 준비하느라 왠지 분주히 밤새우는 날들로 가득할 것만 같아서 또르르. 슬픈 느낌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데 왠지 나 또한 그럴 것만 같다는 피할 수 없는 예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 온 다음에 '빨래'하는 삶, 단계적으로 지향해보기. 빗방울 소리의 리듬감에 맞춰 또독또독 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