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은 NO. 뭔가 남다른 '뉴노멀맘' 지향기
'없다'는 것은 많은 걸 이끌어 낸다. 그 어떤 사람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도 한다. 또 다른 경우에 '무'는 우울에 우울을 더해 극심한 회색빛의 나날들을 창조하게끔 분위기를 유도한다. 무언가가 부재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상실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부재'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게끔 이끄는 기폭제가 될 때가 있다. '부재'의 극치를 경험한 예술가들, 이를테면 경제력의 부재나 동반자의 부재로 인해 무언가를 창작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성공한 사례가 실로 있어왔으므로.
이를테면 이혼한 뒤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려 했던 해리포터 작가 조앤 롤링을 비롯하여, 상실의 설움을 고혹적인 그림들로 승화시킨 화가 프리다 칼로, <작은아씨들>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 등등. 내게도 그 어떤 부재가 있다면 어떤 '영감'을 받고 있는 거라고 적당히 믿어둬도 괜찮은 걸까. 그러고 있으리라고 일단 어설피 상상 시작.
미국 살이 2년 차, 내게도 '없는 삶'이 이어지고 있다. 이 '부재'의 영역엔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있나 곰곰이 생각해본다. 우선 이 넓은 대륙에서 '자차' 없는 삶. 보스턴에서 운전하지 않고 그린라인과 오렌지라인과 같은 전철 T를 타고 다니는 이른바 뚜벅이 라이프. 미국에서 '차'가 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한 건 줄만 알았는데 꽤나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는 이곳이라 오히려 놀랐다. 보스턴의 그린라인은 2호선 같고 오렌지라인은 같은 빛깔의 3호선과 닮았다. 한마디로 '이질감'이 없다. 익숙한 느낌이 자연 젖어드니 또 '불편함'이 없다. (때때로 불편할 땐 남편에게 픽미업! 호소하면 되니까) 고로 '운전' 없는 삶을 PICK.
여기에 더해 '코드' 없는 삶. 현대문명을 거부하자는 의도는 아닌데 그러고 보니 그 핵심만 없는 셈이 되어버렸다. 자동차에 더해 텔레비전 케이블이 없다. (물론 텔레비전 기기는 있다) 현대 문명 20세기의 상징은 거부했을지 몰라도 뉴미디어는 지향한다. 일명 '코드 커터'족을 자처한다. 가입돼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만 다섯 개. 넷플릭스, 디즈니 플러스, 아마존 프라임, 훌루, 그리고 가장 최근의 HBOMAX까지. 보고 싶은 콘텐츠는 아낌없이 시간 제약 없이 시청하고 있으니 이 또한 '불편함' 없고 '심심함' 없다. 한국에서 지상파 채널에 집중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맞춤형으로 골라볼 수 있는 재미가 있으니 '무료함'없고 '답답함'마저 없다. 여기까진 눈에 또렷하게 보이는 것들에 대한 '부재'.
눈에 또렷한 부재는
오히려 깔끔하게 견딜만하지
자동차와 텔레비전 '없는' 삶은 제법 괜찮다. 허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기분'을 좌우하는 것들이 없는 삶은 때때로 무력감을 선물하기도. 일명 '타국 살이'에 없어서 서러운 3단 콤보. 육아에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친정 찬스가 없다. 같은 문화권 안에서 나고 자란 육아 동기들과의 폭풍 수다가 없다. 그리고 모국어를 사용하는 데서 오는 안락한 기분이라는 것들,,, 역시 없다. 누렸다면 소소하고도 별것 아닌 것들이었을까. 실로 느끼지 못해서 더 '없다'고 한탄하는 것들 되시겠다.
모든 일은 '균형'을 잡아간다. 무언가 '없는' 대신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들도 있으므로. 타국에서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해 본 덕분에 웬만한 강도의 고된 업무쯤이야 견딜 수 있겠다고 생각할 만한 '여유'가 생겼다. 내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어쨌든 이 시국에 안전하고 무사하게 아기 낳고 잘 살아가고 있는 걸 보면 어떤 환경에 놓여도 눈치껏 잘 적응할 수 있는 '변수 감당력'도 확장됐다고 평가한다. 같은 방송국에서 같은 방송 프로그램만 10년 가까이 맡아 변화 없는 삶이 내 발전 가능성을 저지한다고 늘 불만이었는데, 매일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는 타국 라이프는 내 불만의 근원을 쏙 집어넣는 근원이 되었으니 이 또한 (+) 플러스의 영역에 들어가겠지. 없는 (-) 마이너스의 영역에 상응하는 더하기의 요소들은 끊임없이 싹을 틔우고 초록을 더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아기도 마찬가지. 타국에서 일하는 아빠와 공부하는 엄마인 탓에 아기에게는 의도치 않게 '국적'이 하나 더 생겨났다 (+). 어린 시절부터 다른 문화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덧대어질 테고 (+), 아직 분명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중언어 구사'에 대한 능력치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더욱 놀랍도록 성장해갈 것이라고 (+) 대충 짐작해두고 있다.
무엇 무엇이 '없어서' 아쉬운 만큼, '생겨서' 좋은 것들도 분명히 있으리라. 백설기 '없는' 백일잔치를 치렀고 여전히 양가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만남 한번 '없는' 생을 살고 있는, 게다가 아직 주민번호 뒷자리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이제 막 117일 차 아기지만 그래 분명히 너에게도 (+) 플러스의 영역은 생겨나고 있는 걸 거야. 인생이란 빼기와 더하기의 연속인 것 같거든. (추가 정보.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의 경우, 영사관을 통해 출생신고를 했더라도 주민번호 뒷자리는 한국 입국 뒤에 부여받을 수 있다.)
타국살이의 ‘없는 삶’
인생이란 빼기와 더하기의 연속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또 하나 '없는' 게 생각나버렸다. 부끄럽게도 출산 후, 탈모방지 '없는' 삶. 임신하고 출산하면서 그렇게도 머리카락 많이 빠진다는데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던 걸. 미국에서도 머리카락 꽤나 빠지는 삶을 살고 있다. 간혹 손가락 조물조물 거리는 데 신이 난 아기가 머리카락을 잡기라도 하면 그 날 빠지는 머리카락은 평소의 두 배쯤 되는 슬픔. 미국 코로나 속에서 미용실도 맘 편히 못 가는데 탈모방지를 위한 두피관리는 그저 남의 이야기잖아. 그리하여 진작에 약속되었다는 듯, 탈모방지 없는 삶을 매일 일관성 있게 이어가는 중.
다른 건 없어도 또 다른 걸로 보완되는 셈 치겠는데, 이 머리카락이 무엇으로라도 보완되지 않으면 난 좀 슬플 것 같아. '머리카락' 없는 삶, 그럼에도 '탈모방지' 없는 삶은 어떡하지? 아아. 이쯤 하면 '없는' 게 너무도 많아진다. 머리카락은 한두 개도 아닌데... 타국살이의 '없는' 삶은 정말이지 속상해. 오늘도 최선을 다해 마이너스를 메워줄 플러스의 영역을 생각하고 짜내 본다. 그렇게 타국의 시계가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