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은 NO. 뭔가 남다른 '뉴노멀맘' 지향기
해마다 4월에서 딱 열흘 지난 순간을 좋아한다. 슬슬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쯤인 탓도 있지만, 한 해가 시작된 지 딱 100일 지점이기 때문. 1월의 31일, 2월의 28일, 그리고 다시 3월의 31일을 지낸 뒤 정확히 열흘 정도를 더 지내면 한 해의 시작, 1월 1일로부터 100일을 맞이하는 순간이 된다. 새로운 일 년을 시작할 때 겪게 되는 묘한 흥분감에 덧대어 이런저런 작심삼일의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어느 순간 새로운 해를 보내는 것도 작년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일이로군... 하며 몹쓸 슬럼프를 또 한 번 겪게 되는데 100일쯤이 되면 그 모든 좌절과 실망감마저도 넘어서면서 한결 새로운 해의 흐름에 적응이 된다.
아기 백일이 됐다. 신기하게도 아기 생일이 4월 9일. 한 해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즌에 아기 탄생이 겹쳤다. 올해뿐만이 아니라 매해 같은 순간 아기 생일에 설레고 한해의 100일 남짓이 지나가 줬음에 안도하며 기분 좋음의 지수를 늘려갈 거라고 생각하고 나니, 새삼 딱 그때 맞춰 태어나 준 아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갓 연애를 시작한 풋풋한 커플이 비로소 100일 동안 함께했음을 자축하는 느낌과도 닮았을까. 그냥 태어나도 적응하기 썩 쉽지 않을 세상인 데다가 2020년은 코로나 대란까지 겹쳤으니 이 혼돈의 시기에 바깥에 나오는 게 내키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탈 없이 건강히 적응해 온 100일의 시간. 총 2400시간의 날들이 참 아련하게 느껴진다.
아쉽지만 백설기는 없다. 아기 백일, 백 백 자에서 획수 하나를 뺀 흰 백 자의 백설기를 100명의 사람과 나눠야 아기가 앞으로도 무병장수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전해 들은 바, 당연히 그리 준비하면 좋았겠으나 미국에서 생활을 이어가다 보니 그 당연하고 평범한 관습을 지키기도 쉽지가 않았다. 백설기를 맞출까 싶어 한국 떡집에 문의해보았는데 한 시루당 80달러, 약 60조각 정도의 떡이 나온단다. 코로나 때문에 모임도 최소화하고 외부인 만날 일이 전무한데 개수가 좀 과하지 싶다. 남편 교수 동료들과 떡을 나눈다면 모를까 접촉을 최소화하는 언택트 시국에 푸짐히 떡을 맞추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그냥 한인마트에서 소량의 증편과 오메기떡을 구입하는 걸로. 대신 같은 금액으로 우리가 평소 좋아하던 케이크 가게에서 예쁜 케이크를 사고 먹음직스러운 자태의 과일을 적당히 준비하기로 했다. 타지에서 살다 보니 이래저래 융통성 발휘력은 최고.
미국에서 백일 치르기. 떡 외에도 여러 가지 요소들과 타협해야 했다. 한국이었다면 백일상 대여부터가 가장 기본일 텐데, 미국 이곳에서도 백일상 대여업체들이 자리하고는 있었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업체가 많지 않다 보니 비슷한 시기 아기 키우는 가정들과 백일상이 다 똑같은 모양새가 될 것 같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아무 외부 도움도 받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 아빠의 손으로 꾸며주는 게 좀 더 의미 깊을 것 같다는 생각.
소소하지만 틈틈이 아이디어를 짜내기로 했다. 백일상 전체를 감쌀 시그니처 색상을 정하고 소품을 하나 둘 사 모으기 시작. "우리 백일상 콘셉트는 하늘색 풍선이야. 하늘하늘한 베이비 블루 색깔이어야 해. 케이크도 풍선도, 테이블 보도." 남편에게 일찍이 다짐하듯이 말해두었다. 핑크색만 좋아하던 나인데 아들 백일상 앞에서는 평소 좋아했던 색깔들이 다 소용없다.
옷은 무얼 입히나. 한국이 아니니 백일 한복 대여에도 제약이 많았던 게 사실. 딱 한두 번 입고 말 전통의상 대신 깔끔하게 멋 낼 수 있는 우리 스타일의 옷을 짠 입히기로 결정. 그런데 아기 옷보다도 엄마 아빠 의상 챙기는 걸 깜빡했네. 다행히 한국에서 작년에 이고 지고 온 각종 방송 의상들이 옷장에 채 다 풀어두지도 않은 채로 가득했다. 역시 맥시멀리스트다워. 굳이 새로 신상옷을 살 필요는 없었다. 백일 준비에 엄마 아빠의 옷장 정리가 더해지니 이만하면 아기 백일을 축하하는 데 아쉬움이 없겠다 싶었다. 아기 백일 파티 준비하는 게 마치 수능 백일 남겨둔 날 좋은 점수 기원하는 의식을 치르는 게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경건했고 진지했고 하나하나 모든 과정에 신중했다. 백일상 짠 차리는 날 아기만 방긋방긋 예쁘게 웃어주면 정말 좋을 텐데!
떡집에서 당일 신선하게 갓 쪄낸 따끈따끈한 백설기 대신 한인마트에서 사 온 몇 조각의 냉동 모둠떡들이 전부였지만 아기 백일을 진심 다해 축하하는 마음은 그 어느 육아의 순간보다도 쫄깃하고 촉촉했다. 전통 백일상을 대여하는 것만큼 고풍스럽고 멋들어진 매력은 없었지만 한 달 전부터 누누이 강조한 '베이비 블루' 색깔로 아기자기함을 더하는 맛, 오랜만에 교실 환경미화 심사를 앞두고 셀프 꾸밈에 혈안이 되었던 추억들마저 솔솔히 떠올랐다. 덕분에 여고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오묘한 착각까지 선물 받았으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네.
하나부터 열까지 셀프. 따끈따끈한 백설기와 수수팥떡 없이 우리 세 식구만의 소소한 백일잔치 치러내기. 전통과 관습을 있는 힘껏 존중해내진 못했지만 대신 엄마, 아빠만의 개성 담아서 아기 추억 만들어주기. 아기 백일잔치 핑계로 우리가 평소 좋아했던 컵케이크 가게에서 평소라면 절대 주문하지 못할 개수의 푸짐한 양의 케이크를 케이터링으로 주문해보기. 예쁘게 상 차려 내고 나선 냉동실 행. 시원하게 넣어둔 뒤, 아침마다 두고두고 하나하나 꺼내먹기 미션에 미리 설레 두기. (엄마, 아빠만 맛있는 거 먹어서 대단히 미안)
나중에 자신이 찍힌 백일사진을 들여다보며 아기는 이 순간을 어떻게 희미하게 담고 기억하게 될까. 예쁜 너의 모습과 함께 "엄마, 아빠도 타지에서 참 수고가 많았다"라고 늦게나마 격려해줄 수 있는 나이, 언젠간 너에게도 찾아오겠지? 아기 백일에 이르기까지 한국 아닌 타국에서 백이면 백, 꽉 채워서 고생한 우리 스스로에게도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