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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A하는 아나운서 Oct 09. 2024

사과 주의보. 촘촘히 '사과'하는 하루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감사일기를 쓰라고들 한다. 대단한 이벤트가 없어도, 소소하게 거머쥔 일상에 고마워하는 하루. 아니 뭔가를 획득하지 않았어도 무탈히 지나가는 하루에 '고마워'할 필요가 있으니까. 적다 보면 정말 고마운 순간들이 많더라! 끼적이지 않았다면 쓱 지나쳤을 순간들을 하나씩 곱씹다 보면 일상은 참 고마운 거였다. 한번 써보니 고마운 일들이 자그마치 다섯 개는 적어지더라. 아무 사건 사고 없이 지나가는 24시간마저도 너무 고맙다.


사과 일기를 생각해 낸 건, 다름 아닌 감사 일기에서부터였다. 오늘 하루 고마운 일들을 참기름 짜내듯, 똑똑 떠올려내는 작업일진대, 나는 참기름을 짜다가 길을 잃고 종종 들기름도 짜고 돈가스 튀기고 남은 찌꺼기 기름도 기웃거렸다. "아, 이거 진짜 고맙네" 감탄하고 감복하면 될 일인데, 나는 "죄송합니다" 머리를 조아린 순간들을 반복해 떠올리는 데 좀 더 시선이 가 있던 거다. 오늘 하루 나 몇 번 '사과'하고 살았지? 진짜 '미안하다'는 말 몇 번 했는지 세어볼까? 물론 이건 고마운 일과도 밀접한 관련은 있지! "죄송하다"고 사과했더니 별일로 더 번지지 않아서 다행. 내 사과가 먹혀줘서 감사한 순간. 최대한 반복해서 미안하다고 하니, 상대방이 더 뭐라 하지 않아서 너무나 고마운 순간.


얘가 저희 애 장난감 뺏어갔어요
얘, 조심해.
너 너무 위험하잖아


신경다양성 아이랑 같이 일상을 걷다 보면 미안할 일이 많다. 아이가 부주의해서, 마음 표현이 서툴러서, 사람 간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서 자꾸 '선 넘는' 행동이 많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다른 사람 신발도 꾹꾹 잘 밟고, 예쁜 가방 보이면 스스럼없이 만진다. 미끄럼틀을 타다가 처음 만나는 여자 친구를 덥석 끌어안아서 그 엄마가 당황할 때도 있고, 그러다 보면 지켜보는 나는 더 조마조마. 저러다가 처음 보는 친구 옷 단추라도 뜯길까 봐, 좋다고 과한 애정표현하다가 예쁘게 묶인 머리 한 가닥이 흐트러질까 봐, 저 친구 밀치다가 넘어질까 봐, "아우, 내려와! 죄송합니다" 연신 반복한다. 나도 딸을 키워봐서 안다. 내 아들처럼 키가 큰 아이가 옆에서 멈칫멈칫 있다가 실수로라도 밀려 넘어질까봐 발을 동동 구르는 마음. 내 아이가 다치고 아픈 상황 앞에 그 누구도 너그러울 수 없다. 그러니까 일단 무조건 사과한다. 너무너무 미안한 일이다.


오늘은 또 어떤 사과를 하게 될까. 촘촘히 이어지는 사과의 날들


자발적 '사과 주의보'. 언제부터인가, 대신 사과하는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아이의 엄마라면 누구나 비슷한 상황이지만, 나는 평균치의 약 2배, 3배 정도 더 한다고 생각하면 조금 끄덕여질 지 모르겠다. 아들과 집 문을 나설 때면 사과할 준비를 단단히 한다. 외출할 때 둘째 기저귀를 챙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상이 됐다. 그럴 일 없으면 더 좋겠지만 어찌됐든 모든 건 미리 준비하는 게 좀 더 낫더라. 미세먼지주의보보다, 곧 자주 찾아올 한파주의보보다도 내겐 더 중요한 일기예보.


아기아기할 땐 얘가 누구를 '툭' 쳐도, 엘리베이터에서 누구 발을 밟아도, 허락 없이 만져도 이해가 되는 세상'이었는데, 머리가 점점 자라니 사과가 반드시 필요한 나이가 됐다. "미안해"라고 시키면 아이도 꾸벅할 수 있지만, 그보다 내가 한 발 더 빠르게 나서는 게 상황정리에 도움이 된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내 엄마한테 꽂히므로. "너무 죄송합니다". 여러 번 반복하고 나면 웃고 넘기는 사람도 있고, 이면지를 구기듯이 표정도 꼬깃꼬깃 일그러지는 풍경도 제법 많이 볼 수 있다. 더 뭐라 하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순간을 넘기고 나면 결국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음에 탈이 나고 만다. 마음이 깜깜한 잿빛이 될 때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속풀이도 한다. "나 오늘 사과 몇 번이나 했게?" 대부분은 사과를 했는데도 따가운 시선을 건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모인다. 사과를 거듭하느라 빨개진 얼굴과 민망했던 마음을 구태여 찌질한 뒷담화로 커버하고야 만다.


고백하건대, 아이를 낳기 전엔 딱히 '사과'가 필요하지 인생을 살았다. 건방지다고?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사과 총량의 법칙. 그때 안 한 사과들, 애들 키우면서 무한 몰아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잘난척은 넣어두라고 생각하실 필요 없다. 학교에서는 FM 모범생으로 지냈고, 들어가고 싶었던 방송사 최종 가까운 면접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단골이었다. "너무 모범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가 '왜 이렇게 했냐고' 탓한 적이 거의 없는 바른 길만 오롯이 걸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딱히 사과할 일이 없을 수밖에. 일탈을 하거나 실수가 잦거나 하다못해 지각이라도 부지기수여야 '미안하다'고 하지, 난 딱히 미안할 일이 없는 꽉 막힌 모범생의 전형이었다. 효도를 살뜰히 하진 못했어도 우리 엄마는 나 때문에 '미안하다' '죄송하다' 할 적은 별로 없지 않았을까. (아, 미안합니다. 이 또한 제 생각이니까요.)


나는 정말 사과를 몇 번이나 하고 살까. 하루에 평균 다섯 번 정도 한다 치면, 1년에 1825번. 사과를 운 좋게 안할 수 있는 날도 있을테니, 적당히 1800번쯤이라고 해두자. 미안할 때 미안하다고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반복하는 일상이 켜켜이 쌓이면 가끔은 끈적하게 절여진 사과잼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아재개그를 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만...) 사과를 하다가, 하다가, 정말 진절머리 나게 많이 한 날은 그 사과잼이 결국 폭탄이 돼서 눈물샘을 '팡' 터뜨린다. 도대체 왜 이렇게 미안한 일들이 많은 건데!


밑도 끝도 없이, 남의 차 뒷자리에 갑자기 올라타서 "죄송합니다".  식당 다른 자리에 홀연히 앉아서 시켜주지 않은 감자튀김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앉아있어서 "죄송합니다". 모르는 친구가 사들고 있는 새로운 장난감을 덥석 빼앗아 관찰해서 "죄송합니다". '그 나이 애들이 다 그렇죠!' 웃어 넘기기에는 황당한 상황이 많아서 일단 무조건 "죄송합니다"


“아들아, 제발 감자튀김은 우리 자리에서만 먹자!”


반복되는 사과에 무릎이 털썩 꺾일 때쯤, 그나마 다시 몸을 일으키는 건 예상치 못한 따뜻함 덕분이었다. 온갖 차 브랜드 종류를 웬만한 중고차 딜러 못지 않게 다 꿰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 차 앞에 찰싹 달라붙어 관찰에 꽂힌 아들을 보고 "더 보라고" 자기 차 만져보게 해주는 사람. 모르는 친구 옆에 앉아 그 친구 장난감을 만져대도 "이것도 해볼래?" 더 꺼내주는 또래의 엄마. 낯선 사람 식탁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먹고 있는 애가 기가 막혀서 거의 울 것처럼 사과하는 나를 두고 "더 먹으라고" 음식 챙겨주는 할머니. 말도 안 되는 아이의 돌발행동 앞에서 침착하게 웃어주는 사람들... 숨이 막히게 미안한데 말도 안 되게 고마워서 가슴을 쓸어내린 날들이 있었다.


이 글은 "더 이상 사과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이렇게 야박해서야 되겠어요 우리 아이는 특별하니까 좀 봐주세요." NONO. 신경다양성 세계를 너그러이 이해하자면 사과 따위 필요 없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 더더욱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했고, 미안하고, 가슴깊이 죄송할 순간들이 앞으로도 더 많을 것이다. 마음 표현이 서툴고 조심성이 없고 누군가를, 무언가를 만지고 접근하는 데 적당한 선이 없는 아이를 제지하다 실패했을 때, 그 긴장감을 토닥여주는 어른들에 대해 '고맙다'는 이야기다. 아이의 행동에 사과하는 날들 속에서 씨익 웃고 넘겨준 그들에 대한 감사일기의 변형이다.


오늘은 또 어떤 사과를 하는 날이려나. 매일 눈을 뜨면 내가 아침을 여는 생각 루틴. 어린이집에서 친구 낮잠 잘 때 자꾸 위에 올라가서 말을 탄다던데, "오늘은 제발 그러지 좀 마". 친구가 미끄럼틀 타면 자꾸 같이 타겠다고 옆에 끼어 앉지 마. "그러면 친구가 싫어할 수 있어". 엄마 스타벅스에서 커피마실 때 자꾸 옆자리 커피 뭐 먹는지 그 자리까지 뛰어가지 마. "사람들이 불편할 수 있어". 잔소리 퍼붓고 싶은 순간이 무한 가지인데, 정말이지 '까르르' 해맑게 웃음보 터뜨리는 아들 앞에서 또 할 말을 잃고 같이 허탈하게 웃는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오늘은 한 명만 더 만났으면 좋겠다. 결국 내 희망사항은 이토록 간결하다. 내 사과가 가닿는 그곳이 조금은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곳이었으면 한결 낫겠다는 것. 오늘도 죄송한 상황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무탈히 넘어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우, 어떡해.
저희 애 때문에 너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사과에 사과를 꼬리물고 뒤돌아 나와 커피 한 잔. 오늘의 커피는 그냥 '쓴 맛'
세상과 함께하는 방법을 연습하고 있거든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다고 해주시면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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