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바로 이전 화에서 사과 이야기 참 많이 했는데 기세를 몰아, 사과 한판 시원하게 하고 시작하겠다. 대놓고 아들 능력 자랑 좀 하려고 한다. 요즘은 조부모님들 손주 자랑하려거든, 돈 내고 시작하라고 한다던데 나는 빤빤하게 그냥 풀어놓으려고 하니 이 또한 너무 '죄송'해야 할 일. 이상한 게 아니라 독특한 거라고 힘주어 이야기했는데, 도대체 그 무엇이 '특별하다'라고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사람 손? 또래들보다 말이 다소 느리다고 해서, 조심성이 없고 상상치도 못한 돌발행동이 유독 많다고 해서 '우리 애가 참 남다르다고' 신경다양성 세계에 사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을 리는 없고. 신경다양성 아이를 키우는 엄마 시점, 무엇이 특별할까! 무엇이 대단할까? 느린 아이라도 잘하는 게 있고, 산만해 보여도 몰입력 대단한 분야가 있다. 생각할수록 참 신기방기한 구석이 있다.
너 절대음감이야?
내가 베토벤을 낳았나 봐
이미 애들 낳은 아주미지만, 나도 종종 숏폼 콘텐츠를 만든다. 한참 해온 인스타그램에다 아이들 예쁜 사진을 뭉게뭉게 조합해서 30-40초 되는 릴스를 만들고 나면, 조회수가 크게 안 올라도 그냥 내가 다시 보는 재미에 뿌듯함이 있다. "아고, 내 강아지들. 아고 예뻐" 할머니 리액션을 쭉쭉 뿜어내는 데는 릴스 감성만 한 게 없지. 그런데 왜 아들자랑 예고해 놓고, 릴스 타령이냐고? 그러니까 우리 애가 릴스에 넣은 음악을 기가 막히게 흥얼거린 뒤부터다. 할 수 있는 말의 가짓수도 안 많은 애가 음악을 왜 이렇게 기억을 잘하는 건데?
한 번은 동네 풍경 한번 쓱 담고 그 위에 걸그룹 음악을 올려서 편집했는데, 내가 만든 릴스를 몇 번 보더니, 그 뒤로 정확히 그 구역의 길을 지날 때마다 걸그룹 노래를 흥얼거리는 거다. 평소에 따로 찾아 듣는 노래가 아니라서 쟤가 어디서 저 노래를 들었나 했더니, 잠깐 지나가듯이 시청했던 내 릴스 배경음악이었던 것. 등에 쏴 아악, 소름이 돋았다. 도치맘은 이럴 때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어머, 내가 베토벤을 낳았나 봐!!!" 아들이 세상을 바꿀 음악을 만들 음악 천재로 이름을 날리는 건 아닐까 싶어 흥분한 건 안 비밀이다. 신경다양성 아이 엄마들은 한 번쯤은 "내 아이가 이러다 천재가 되는 건 아닐지" 서번트 증후군을 상상해보곤 한다. 쉽게 말하자면 법전을 통째로 외워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우영우 변호사가 대표적인 사례.
괴짜 음악가가 되는 건 아닐지 호들갑을 떤 건 사실 웃자고 하는 소리고... 그럼에도 나는 유독 다 '느린 아이'가 이렇게 선명히 기억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했고, 감격했다. '잘할 수 있는 게 한 개도 없는 줄' 알았지만 남들보다 생생하게 잘할 수 있는 것도 있겠구나, 기대를 품은 구간이었다. 늘 또래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했으니, 하나라도 잘하는 구석이 있으면 흥분할 수밖에. 물론, 음감이 좋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사람 많은 곳에서 같은 구간 계속 부르면 사람들이 싫어할 수 있단다. 아들!)
음감도 탁월했는데, 시각적 기억력까지 탁월해주는 건 또 어떤데? '오늘 가는 데가 참 몇 층이더라...' 엘리베이터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면 아들은 대뜸 밑도 끝도 없이 10층이랜다? 근데 10층이 맞았다. 얻어걸린 정답일까, 진짜 기억하는 걸까? 호기심에 여기서도 저기서도 의도적으로 '헤매봤다'. "거기가... 몇 층이더라?" 놀랍게도 한번 와본 곳에 아이를 데려가면 늘 그곳이 몇 층인지 알려준다. 초록색 검색창 다시 안 켜도 되니 인간 지도가 따로 없다. 헷갈리지도 않나 봐. 데리고 다니면 지도 검색에 드는 셀룰러 데이터 아낄 각! 흐르는 음악을 포착해서 기억하듯, 얘는 공간도 '사진 찍듯이' 통째로 넣어두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쯤 하면 흘러가는 음악이든, 고정된 장소든 정보를 입력하는 체계가 나랑 완전히 다른 게 아닐까 막연히 상상해 본다. 뇌구조를 추측해 보건대, 세상을 3D 프린터쯤으로 찰칵찰칵 떠서 통째로 소화시키나 보다고 흡족해했다.
물론 모든 세상사에는 '명암'이 있지. 이토록 선명하게 고화질로 정보를 저장해 두면 다른 한쪽은 탈이 나기 마련이다. 또래들이 흘려보내는 정보들을 고스란히 안 버리고 악착같이 품고 기억하는 거, 그거 너무 힘들지 않을까. 에너지 거참 많이 쓰일 것 같다. 거기가 10층인지 7층쯤인지 무심히 지나쳐도 괜찮은 건데, 지금 지나는 장소랑 연관된 노래, 굳이 다 꼬박꼬박 받아쓰기하듯이 기억 안 해도 되는 건데, 깨알같이 정보를 저장하는 데 하루 에너지를 죄다 몰았으니 입력하다 과부하 생길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알 수 없게 정보가 넘치는 날, '폭발적으로' 화도 내고, 생떼도 쓴다고 해석한다. 울고 소리 지르는 이유가 다양할 수 있으나, 나는 아이가 담아두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줄줄 흘러넘치다 보면 그럴 수 있겠다고도 미리 끄덕여둘 때가 있다.
남들보다 '더' 깨알같이 기억해 내는 능력'에 상처받지는 않았으면 싶다. 느린 아이로 살던 인생에 '잘하는 게' 생기면 신기하다 못해 날아갈 듯이 설레는데, 그것도 잠시! 다른 엄마들은 경험한 적 없을 것만 같은 걱정보따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열어보고 닫았다가 이고 지고 걸어간다. 봐봐, 생각해 봐. 이 담에 커서 연애 한 번을 하더라도, 관계가 쫑나면 툴툴 털어내고 적당히 추억을 지우고 살아야 유리한 거 아닌가! 내 아이는 여자친구랑 간 식당의 도로명주소를 기억한다든지, 먹은 메뉴의 가격을 기억해 낸다든지, 당시 그 애에게 선물한 목걸이 펜던트의 세세한 디자인 패턴을 떠올린다든지, 쓸데없는 추억까지 다 담아둘까 봐 안쓰럽다. 거름망 없는 아이의 기억장치, 그 특별함에 결국 스스로 지칠까 봐 매사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고 안쓰러움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아이가 가진 그 '특별함에' 먼저 손뼉 쳐주기로 한다. 잘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건 하루를 살아내는 동력일 때가 제법 많다. 잘하면 칭찬도 받고, 예사롭지 않으면 박수받을 수 있으니까. 뒤따르는 부작용과 후유증이 어떠한 들, 아들이 '박수받는 순간'도 소량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오늘은 이겼다.
딱 한 번이라도 "우와, 이걸 어떻게 알아?", "너 진짜 대단하다!" 감탄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싶다. 변두리에서 조용히 숨죽이는 몸짓이 아니라, 무대 중앙에 나서서도 온전히 당당할 수 있는 자태였으면 한다. 아들 자랑 할 수 있는 요소가 자꾸자꾸 생겼으면 하는 건 다들 똑같은 엄마 마음인 걸까. 독특하고 특별해도, 수채화 물감처럼 걱정 번지게 하지 않을 테니까, 한번 더 자발적 도치맘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