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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A하는 아나운서 Oct 11. 2024

흑백인간, "입력값이 잘못됐습니다"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흑백요리사>가 인기라고들 한다. 백수저와 흑수저에 해당하는 영역에서 각 구획의 요리사가 요리능력치를 겨루는 살 떨리는 순간들이 짜릿하다. 흑의 영역에 있든, 백의 영역에 섰든, 요리계에서 능력 짱짱한 이들일진대, 라운드마다 들이대는 어떤 '잣대'에 의해 당락이 결정된다. 도전을 계속할 수 있는 '합격'으로 가든, 아무리 능력 좋아도 떨어지는 운명에 처하는, '불합격'에 낙점되든, 둘 중 하나인 것. "아, 저 사람 실력 진짜 너무 좋은데, 지금 떨어지기 너무 아까운데!" 흑과 백 사이 회색 영역은 없나? 물음표에 탄식을 더해봐도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다. 둘 중 하나인 거다. 계속되는 라운드에 IN 할 것인가? 그 치열한 기차 탑승에서 OUT 될 것인가!


느린 아이를 키워오면서 일상 매 순간이 '바둑'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흑과 백의 조합으로 다닥다닥 네모 판을 채워가는 과정. 바둑에서 흑과 백을 벗어난 색은 없다. 어떤 알이 '흑'이면 어떤 알은 '백'이다. 우아하고 고혹적인 그레이 빛이 감도는 알, 상황에 따라 가을빛 감도는 브라운 알 따위는 없는 거니까. 바둑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참 답답해진다. 감정에 따라 적당히 채도를 달리할 수 있는 순간도 있는 거고, 어제와 오늘, 내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때때로 유연한 빛깔을 한 스포이드씩 첨가할 수도 있는 게 인생 아닌가. (이렇게 말하니 제법 수십 년 살아낸 어른 같지만!) 아이는 흑일 때 반드시 흑이어야 하고, 백일 때 반드시 백이 나오는 딱딱 떨어지는 방식으로 살아낸다. 너무 비유적 표현인가? 쉽게 풀어 말하자면 '융통성이 홀연히 도망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빨간색 시소 타?
응, 빨간색 시소 타!


노란색 미끄럼틀 타?
응, 노란색 미끄럼틀 타!


적어도 우리 집에서 놀이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지어다. 애들은 자기들 세상이니 좋고, 나는 나대로 커피맛 볼 시간 버는 전략의 터전이니까. 애들 그네 밀어주고 한 모금, 시소 붙잡고 한 모금 머금는 거 실로 가능하다. 첫째랑, 둘째랑 놀이터에 가면 둘 다 그렇게나 들썩들썩 방방 뜰 수가 없다.


그런데 첫째는 한 가지 의식을 꼭 치러주셔야 한다. 뭘 해야 하는 건지, '입력값'이 정확히 있어야 하는 거다. 둘다 즐겁고 신나게 뛰노는 건 똑같은데 입력값이 없으면 '해도 되는 건지, 저쪽으로 달려가 버려도 괜찮은 건지' 확신의 답을 구하러 내앞에 선다. 자신의 물음표에 느낌표를 더해주기를 초롱초롱 기다린다. 친구가 없고 자리가 비었으면 '충분히 해도 되는 거잖아?' 그런데 흑과 백 영역처럼, 명확하고 또렷한 명령어가 아니면, 아이는 수식이 다소 꼬이기라도 하는 듯! 내 리액션 따옴표 안에서 조사가 바뀌거나 부사어가 하나 추가되거나, 흐릿한 어조로 말끝을 흐려버리면 입력값은 필히 오류가 난다. 흑돌을 원하면 흑돌을 정확히 입력해줘야 하고 백돌을 원하면 백돌을 명명백백히 입력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투명도 설정값을 내려버리거나 회색 닮은 흑색, 초록빛 품은 흑색으로 변형값을 주면 그날의 오후는 아이가 '고장 난다'. 웬만해서 입력값이 정확해야 한다.  


빨간색. 자동차. 타!
하얀색. 얼룩말. 타!

이거. 칠해?
응. 이거. 칠해!


신경다양성 세계가 모두 그러하다는 것은 물론 아님 주의! 이름만큼이나 신경다양성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우리 아이가 입력값에 예민한 친구라면, 또 어떤아이는 입력값이 어떻든, 필요한 행동을 찰떡같이 이행해 내는 능력을 꺼낼 수도 있을 것이다. 흑돌을 입력해도 빨강돌, 파랑돌을 척척 꺼낼 수 있는 화려한 변형의 천재들도 당연히 존재하리라. 입력값 대로 행동하는 건 주로 '구조화된 환경에 익숙한 아이들'인 경우가 많다. 놀이 구조가 조금만 바뀌어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거나,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헤매기도 한다. 빨간색 타고 오라고 하면 반드시 빨간색만 타고 오고, 그 옆의 노란색을 옮겨 타고 싶으면 저 먼 길을 돌아 굳이 나한테 와서 "노란색을 하라"는 명령어를 기다린다. 어떨 땐 이거슨 코딩인가도 싶다. 명령어를 입력 하면 행동하고, 그 입력값이 정상작동해야 다음 명령값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 아이들 코딩학원도 인기라던데 나는 실로 그 코딩 내가 하고 있다. 소위 신경다양성 아이 엄마의 코.딩.육.아.


주황색. 타? 주황색. 타! 또박또박 타이핑 하듯이 음절을 꼭꼭 씹어 이야기하면 아이는 뚝딱 가서 이행한다. 입력값이 정확하면 우리애도 잘 해낼 수 있다는 방증


"쉬하러 간다"는 아이가 연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또 나오던 날, 이제 나는 아이의 입력값에 또 뭔가 오류지점이 있음을 직감해 낸다. "응, 괜찮아. 하고 와!" 분명히 허락의 입력값을 넣었는데 애는 또 뛰쳐나온다. 조바심 나게 왜 이래. 어렵게 완성한 배변훈련이 되돌아돌아 도루묵되는 건 아니겠지? “해! 왜? 왜!” 다급해지면 입력값을 반복해서 눌러대는 부작용. 재촉의 몇 마디를 또렷하게 쥐어줘도 아이에게 곧장 적용이 잘 안 된다면, 뭔가 신호 입력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틀림없네.


아이가 돌아 나온 길 그대로 쫓아가보면 아이의 변기 위에 동생의 수건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거나, 핑크색 범벅 된 머리핀이 변기 뚜껑 위에 놓여 있었다거나 그런 식. 그러니까 그냥 변기 VS 수건이 올려져 있는 변기, 아주 작은 단서의 차이가 아이에겐 별거 아닌 게 아닌, ‘꽤나 별거인’ 문제가 되어버린다. 아우 진짜 섬세하기도 하지. 저거랑 저거랑 대충 똑같은 상태 아니냐! 적당히 타협 좀 해주지. 너 정말 다른 세상에 살고 있구나. 변기 위에 뭐가 올려져 있으면 그거 치우고 하면 될 것 같지만 이 아이에게 전혀 다른 자극으로 다가오는 거다. 그래서 아침마다 사과를 먹을 때도 차암, 얄밉도록 엄마 들볶는 예민남이 된다. 맨질맨질 베이지색 사과 속살이 ‘아이가 먹는 사과’여야 하는데 가끔 빨간껍질이 덜깎여있으면 그 사과가 더 이상 그 사과가 아닌 게 된다. “응, 내놔! 다시 깎아줄게.”


괜찮아. 해도 돼
응, 괜찮아. 친구 다음에 "해"


 다시 흑과 백의 바둑알 세계에 도오착. 아이에게 적당히 비슷해서 적당히 좀 봐달라는 이야기는 잘 안 통한다. 입력값이 정확해야 움직일 수 있다. 최대한 또렷해야 아이에게 잘 입력된다는 걸 이젠 너무도 잘 안다. 이것도 저것도 비슷한데 대충 이해해줬으면 하는 흑도 백도 아닌 상태의 모호함은 아이가 봐주지 않는다. "아휴, 진짜 엄격도 해" 신경다양성 세계에서 아이랑 걸어간다는 것은 그렇다. 별것도 아닌 것이 별것이 되고, 매 순간 아이의 새로운 시선에 감탄하고 마는 것. 그래서 유별나다고, 특별한거라고 무릎을 치는 순간이 늘어간다. 그러면서 새로운 세계를 깨달아 간다. 네가 아니었으면 관심도 없고, 막연했을 지대의 이야기들이 내 것이 된다. 이글을 읽는 당신도 한번쯤 그 세계를 상상해봤으면 좋겠다.


아귀가 꼭꼭 맞아 떨어져야 하는 퍼즐처럼 아이를 움직이는 명령어는 실로 정확해야 한다. 수식이 정확해야 아이의 세계가 꼬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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