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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현 Oct 12. 2024

들어는 봤니? 키즈카페 메뉴판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오늘은 우리 어디 갈까?"
여기에서 골라봐.
하나 둘 셋, 찜!


우리집엔 조금 독특한 메뉴판이 있다. 주말마다 아이가 가고 싶은 공간을 사진으로 담아 A4용지에 나란히 잘 보이게 배열해 둔 거다. 주말만 되면 아침부터 '어디 갈지'에 대한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남매는 아직 요일을 모른다. 그 말은 즉, 오늘도 아침부터 부지런히 나갈 생각에 들떠 있다는 얘기. 8시 45분만 되면 이미 신발을 신고 어린이집 가방까지 야무지게 챙겨 매고 현관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아들과 딸의 깨방정 발랄한 몸짓이라니! 이럴 때만 둘은 천상 우애가 넘쳐난다.


"얘들아, 오늘은 제발 좀 천천히 일어나도 된다고!" 덜 뜬 눈을 하고 볼멘소리 해봐야 내 외침은 그야말로 천장에 닿기도 전에 산산이 흩어진다. 현관문 밖으로 나가겠다는 아들딸의 열망이 너무 커서, '천천히 나가자'고 말해봐야 나의 지시어는 효력이 없다. 그래, 나가자 나가. 근데 어디 갈 건데?


둘 중 뭐 하고 싶은데?
키카야?
아쿠아리움이야?


둘 중 하나 골라야 하는 미션은 하루 중 꽤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지난한 여름이 지났지만 그래도 '아아'를 들이켤 것인지, 새 계절 기다리는 마음 담아 '따아'로 전향할 건지, 우리는 둘 중 하나 골라야 한다. 학창 시절엔 독서실에서 새벽까지 공부 다 하고 갈 건지, 집에 가서 편하게 떡볶이 먹으며 공부할 건지가 엄청난 고민거리였다. 직장에 다니며 소개팅을 연달아 몇 차례하고 나면 이런저런 썸이 오고 가기 마련인데 나는 어떤 사람과 더 잘 맞을지, 그다음주말 커피 한 잔을 누구랑 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렸던 것도 단연 어려운 선택이었지. (물론, 가장 맛있는 커피는 전 남친이자 현 남편이랑 함께 했노라고 굳이 부연설명해 본다. 여보 보고 있지?)


그런데 이렇게나 저렇게나 선택이 힘든 경우도 있다. 두 돌 갓 넘은 둘째는 둘 중 하나 고르라 하면 그냥 깔깔대며 둘 다 얘기를 한다. "놀이터 갈 거야?"ㅡ"놀이터!", "물꼬기 보러 갈 거야?"ㅡ"물꼬기!" 그래 그 시절엔 뭘 해도 다 좋은 나이지. 두 돌 땐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음, 그렇고 말고. 자 그럼 최종 선택은 첫째, 오빠의 몫으로 넘어간다. 자, 키즈카페 갈 거야? 책빵 (책박물관) 갈 거야? 물음표 팍팍 입력 제대로 했는데, 3초의 침묵이 이어진다. 그냥 "가자"고 한다. "자, 오빠야, 잘 들어봐! 키즈카페 갈 거야? 책빵 갈 거야?" 다시 한번 조용한 '마'가 뜬다. 엄마 왕년에 방송했던 사람이거든. 개인적으로 아무 말도 안 하는 '마뜨는 구간' 못 견디는 거거든?


신경다양성 세계에 사는 아이들, 유독 '자폐스펙트럼'의 영역엔 선 친구들은 '시각 학습자'라고들 한다. 비주얼 러너 (Visual Learner). 이른바 이미지로 세상을 포착하고, 특정 정보를 기억해 가는 거다. 물론 활자보다 이미지로 이해하는 게 쉬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이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는데, 신경다양성 아이를 키우다 보니 세상을 '사진 찍듯이' 되새긴다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됐다. 두눈이 카메라 같다. ABA치료사로 일하다 보면 자칭 느린 아이 부모님들로부터 '알아서 알파벳을 다 떼버렸다. 한글을 가르친 적도 없는데 스스로 다 구분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도 있다. 이미지, 기호의 상징을 포착하고 내 것으로 흡수해 내는 능력이 실로 예사롭지 않을 수 있겠구나 주목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아이들이 잠들면, 한밤에 코팅기를 꺼내는 일이 실로 많아진 것. 이미지는 결국 신경다양성 아이를 위한 귀엽고도 소소한 배려다. A 장소의 간판, B 공간의 매력포인트, C 공간에서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지점을 차곡차곡 사진 모아뒀다가 메뉴판처럼 편집해서 하나하나 코팅을 한다. 소위 '엄가다 (엄마가 하는 노가다)'라고 하는 게 바로 이것. 리코타 치즈 샐러드를 먹을지, 부라타치즈샐러드를 먹을지, 브런치 카페 메뉴판 보며 두 사진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했던 날들을 떠올린다. 아이의 구미에 어떤 공간이 당길지, 키즈카페 메뉴판을 만드는 밤일 현장이다. "이거 할까 저거 할까" 구어로 던진 질문에 갸우뚱하던 아이는 결국 이미지를 보며 배시시 웃고, 한결 수월하게 선택해 낸다.


물론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며 아이는 구어질문에 대응할 수도 있고, 말로 선택할 수도 있다. (반복연습하면 신경다양성 아이들도 잘할 수 있다. 그건 정말이다.) 하지만 '시각 학습자'라는데 이왕이면 편하게 고를 수 있을 때 더 '씬나지' 아니한가. 할 수 있는 지원은 해주기로 한다.


'감자퓌레'라고 네 글자 큼직하게 쓰여있는 것보다 포실포실한 감자 위에 맛스러운 토핑 더해져 있는 조명빨 잔뜩 받은 사진에 더 끌려본 적이 있던가. 그 요리의 제목은 기억 못 하겠는데, 메뉴판 속 사진 한 장 덕분에 그 맛의 잔상이 음식을 먹고 나와서 한 달, 두 달이 지나도록 맴맴 돌 때가 있다. 이미지의 힘이 그렇다. 하물며 세상을 '사진 찍듯이' 입력하는 신경다양성 아이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이미지 덕분에 세상이 경쾌하고 좀 더 편하게, 즐겁게 느껴진다면 밤잠을 줄여서라도 또 코팅기를 꺼낼 작정이다. 나란 엄마는.


키즈카페 메뉴판은 실로 신박했고, 재밌었고, 곧바로 아이들의 최애템이 되었다. 그래 당연하지, 니들 좋아하는 공간만 다 모아놨는데 그중 하나 고르라는데 안 신날 수 있겠어? 어른 버전으로 따지자면, <흑백 요리사> 출연진이 운영하는 식당 리스트만 쫙 모아둔 셈인데 그 목록에 안 씬나겠냐구우. 선생님께서 귀찮으실 수 있지만 그리하여 나는 종종 어린이집에도 시각 스케줄을 들려 보내고, 야외학습이라도 나가는 날엔 더 정교하게 사진세팅을 해둔다. 아이가 동선을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안 그래도 받아들이는 정보와 감각이 너무 많아 세상 복잡한 아이에게 '이미지'로 하루를 예고해 주는 셈.


오, 그러고보니 닮았다! 어찌 보면 방송국 근무하던 시절 수많은 예고 내레이션을 했던 것과도 비슷하다. "잠시 후, OO이 방송됩니다.", "지금 시각은 10시 10분입니다" 프로그램 예고와 현재 시각 고지도 숱한 일상이었는데 목소리에서 '이미지'로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계속해서 예고하고 고지하고 있다.  대문자 J, 철두철미한 계획아래 사는 게 편한 엄마의 본캐를 아들도 물려받았나. 이미지로 예고해 주면 아이의 일상도 제법 편안해지는 듯하다. 철저히 근거기반 그래프를 그리지 않아도 치료사로서가 아닌, 엄마로서는 분명 알 수 있다. 불안도가 낮아지고 짜증지수도 확 떨어진다. 너도 J가 맞구나! 계획에 따라 사진 예고해주는 것, 고것 참 찰떡이다.


이렇게 시각지원 잘 통한다면, 만반의 준비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사진 찍어 예고해 주고, 이미지 배열 편집해 코팅작업까지 틈틈이 할라치면 이왕이면 사진 화질도 짱짱했으면 좋겠다. 아이 핑계로 최근 출시된 사과폰이 탐난다는 건 남편에게 안 비밀로 해야겠다(?). "음? 내가 갖고 싶은 게 아니고, 우리 애 시각지원 잘해주려면 사진이 많...이 필요한데 더 좋은 화질 사진으로 만들면 애도 좋아할 거고... 그래서 핸드폰 카메라가 성능 완전 최고면 더 좋겠고... (이하 생략)"


웃자고 하는 사과폰 드립 뒤로, 간간이 '무슨 메뉴판을 더 만들어 줄까' 아이디어를 떠올려 본다. 키카 메뉴판에 견줄만한 우리집 메뉴판. 동생이랑 식사 후 뭐 하고 놀지, <저녁놀이 메뉴판>도 괜찮겠다 싶다. 너네들이 좋아했던 놀이 장면만 따다다닥 포착해서 메뉴판 만들어두면 심심하다고 놀아달라고 마냥 떼쓰지 않겠네? 무슨 옷 입고 싶은지 <등원룩 메뉴판>도 신박한데? '오늘 뭐 입지?'에 답 안 나오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는 함정이 있지만! 슬슬 패션 민감해지는 나이인거니까 니들의 취향을 전격 존중하려면 옵션 잘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겠다. 오호, 그러니까 결국엔, 최신 사과폰이 좀 필요하겠는데? 기.승.전.사과폰.


이미지로 세상을 찍는 아이, 이미지로 세상이 더 재밌어지는 아이, 이 아이 옆에서 매일밤 코팅기 꺼내 메뉴판 수작업하는 자발적 엄가다! 신기한 메뉴판으로 무장해 나가는 이토록 별난 집이 여기 있다.


템플 그랜딘은 1996년에 출판한 <그림으로 생각하기>라는 책을 통해서 자폐인인 자신의 시각 지향적 특징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언어는 나한테 외국어와 같다. 말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나는 사운드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총천연색 영화로 번역해 머릿속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돌리듯 돌린다. 누군가 나한테 이야기를 하면 그 말도 곧바로 그림으로 번역된다. 언어에 기반을 두고 사고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자주 한다.

엘런 노트봄, <자폐 어린이가 꼭 알려주고 싶은 열 가지>,  p.116
이미지로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덕분에 이 세상살이가 더 해볼만한다고 견뎌진다면 기꺼이 오늘도 메뉴판을 만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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