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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현 Oct 15. 2024

두 살 터울인데 쌍둥이를 키웁니다

[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둘째를 낳기 보름 전쯤이었을까. 첫째의 손을 붙들고 택시를 잡아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숨이 차서 종종 운전을 하다가 갓길에 차를 세우곤 했을 때라 만삭의 임신부에겐 택시만이 유일하게 안전한 선택지였다. (아이태우고 운전하다가 나부터 실려가면 안 될 일이니까) 대기를 걸어뒀던 발달검사와 언어검사 차례가 돌아온 날이었다.


아이 발달이 다소 느리다는 생각이 들면 대개 대학병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만삭 엄마의 컨디션을 고려했을 때, “야, 일단 동생부터 낳고 뭐라도 하자” 말할 법도 했으나, 쉽게 찾아오지 않는 대학병원 발달검사, 교수님과의 진료 순서를 고려했을 때 내일이 출산예정일이래도 아이 손을 붙들고 가야만 했다. 뭐 대학병원 진료 가는데 혹여 첫째 검사 기다리다가 양수가 터진대도 병원 안에 있으니 위험할 일은 없겠지! 우스갯소리 덤덤하게 흘려가며 첫째 외출 짐을 챙겼다. 신경 다양성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별난 남매를 키워가는 운명의 그 시작지점이 바로 이쯤이었다. <두 살 터울인데 쌍둥이를 키웁니다>, 오늘자 제목의 전주곡이었다.

당시, 첫째 나이 26개월. 내 아이가 다소 ‘특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이후, 20개월 차부터 ABA치료수업을 시작했다. 대개 말이 안 트이면 ‘언어치료’부터 시작하는 게 국룰인데, 돌아보면 우리 부부의 대문자 T스러운 판단력은 정통하기도 하지, 심지어 아이를 센터에 보내는 동시에 나는 어나더레벨로 만삭으로 ABA 코스워크를 밟고 수련을 하러 다녔다. (라고 쓰고 독기 장난 아닌 1인이라 해석) 만삭이 가까워오면서부터는 센터에 데려다줄 에너지가 밑바닥을 보여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는 ABA홈티를 시작했었더랬다.


자, 그로부터 약 2년 4개월 뒤, 두 돌이 갓 지났던 첫째는 54개월 오빠야가 되었고, 당시 뱃속에서 꿈틀꿈틀 귀엽게 움직여주던 아가는 곧 28개월 언니야가 된다. 둘의 터울은 26개월. 약 두 돌 정도의 차이. 80년대 후반생이자 외동딸로 자란 나는 어릴 때부터 “두 살 차이 나는 형제, 딱 좋은데...”라는 아쉬움 섞인 어른들 말을 참 자주 들었다. 당시에는 40명 정원 학급 정원 안에 “외동인 사람?” 손들라 하면 나 포함 딱 3명 정도이던 시절이라 ‘형제, 남매’가 있는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늘 궁금해하면서 살았다. 나도 겪어보지 않은 남매의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두 돌 차 남매를 키우면서 나는 늘 아이들의 기분을 상상한다.



두 돌 차이 나지만
쌍둥이 남매를 키웁니다


두 돌 차 남매를 키우지만, 때때로 쌍둥이를 키운다는 착각에 빠진다. 아들과 딸의 키 차이는 22센티미터, 체중 차이는 5kg 정도. 나이 차도, 길이 차도, 체중계 값의 차도 꽤나 명확한데 발달 나이는 얼추 비슷할 때가 있기 때문. 물론 인생 26개월 먼저 살았으니, 경험치 차는 첫째가 훌쩍 앞설 것이다. 둘 다 자동차 좋아해도 첫째가 26개월이나 먼저 수많은 자동차 브랜드를 섭렵했고, 저 하늘 뭉게뭉게 조각구름을 올려다봐도 2년을 더 많이 본 셈이니까. 하물며 본가가 있는 미국과 나의 친정집, 한국을 오가느라 비행기를 탄 횟수만 해도 첫째가 3번은 더 많다. 코로나 검사 때문에 코를 찔렀던 횟수만 해도 첫째가 월등히 앞서고. 따지고 보면 앞설 것들이 이렇게나 많다. 정작 영유아 검사에서 따지곤 하는 언어와 인지, 소근육 발달 영역과 같은 것들은 둘이 참 사이도 좋게 비등비등하다. (이럴 때만 사이좋게 나란히 나란히라구?)


키 차이 22cm, 몸무게 차이 5kg. 두돌 차이 나지만 때때로 닮은 남매


“다음에 또 올게”
“다음에 또 만나”


첫째가 말하면 둘째가 따라 한다. 혹은 둘째가 뭉글뭉글한 발음으로 외칠 때, 첫째가 좀 더 또렷한 발음으로 멘트를 받아친다. 실은 첫째, 평균 나이로만 따지자면 재잘재잘 긴 문장 얘기하는 수다쟁이 하기 딱 좋을 시절. 둘째는 그 말 어떻게든 따라 해보겠다고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엉터리 문장을 앵무새처럼 따라 해봄직한 나이. 발화의 시작이 느렸던 첫째는 여전히 문장의 길이가 짧다. 위로 형제가 있으면 둘째의 말도 대개는 빠르다던데, 오빠가 빨랐다면 둘째도 더 빨랐을까 하는 생각이 그림자처럼 스밀 때가 있다.


다행인 건 주거니 받거니 핑퐁 할 수 있는 끈끈한 핏줄이 옆에 있다는 것.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말해도 둘은 곧잘 주고받는다. 한 아이의 중언부언을 의미 있게 받아치는 다른 아이가 있다. 오빠가 맥락 없는 반향어를 할 때 동생은 그 옆에서 ‘맥락’을 씌워준다. 뜬금없이 “물고기 안녕?” 말할 때, 동생이 “우리 물고기 보러 갈까?” 하는 식이다. 야, 여기서 왜 물고기가 나와! 속이 잿빛으로 타들어가는 엄마 곁에서 동생은 재치 있게 ‘의미’와 ‘상황’을 짓는다. 38년 살아낸 나보다 38개월도 아직 살아보지 않은 아이가 훨씬 낫구나 생각하는 지점이다.


맥락이 없는 오빠 앞에서 맥락을 만드는 동생. 신경다양성 세계에 갇히지 않게 오빠를 계속 똑똑 두드릴 줄 아는 노크의 고수


두 살 터울인데 쌍둥이를 키우는 기분. 답답할까? 속상하겠지? 이 터널이 계속 이어질 것만 같아 막막할까? 수많은 추측이 오고 갈 것 같지만, 참 놀랍게도 언제부터인가 이 기분은 슬프지 않다. 현실감 팍팍 보태자면 첫째가 약 2년 정도 느리게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지만, ‘느리게’가 아니라 ‘천천히’라는 어휘로 산뜻하게 바꿔내면 굳이 무겁지도 않을 일. 난 비교적 빨리빨리 살아온 인생 아니던가. 수능시험을 치르기 전에 수시로 대학에 갔고, 만 22세 방송기자에 합격했고, 만 23세 아나운서가 됐다. 결혼까지는 빠르지 않았지만서도 대입과 취업정도가 빨리빨리 됐으면 인생에서 한 가지쯤은 천천히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천천히, 그러나 속상해하지 않고 아이 속도대로 즐겁게 가면 되는 거니까.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늘 즐겁다. 엄빠마음이 불안걱정에 소금기 가득 절여져도 니들은 항상 물기 몇 방울 또르르 머금은 산뜻한 배추 같기만 하더라. 그렇더라. 응응?)


 돌잡이 한글 전집을 둘째를 낳고서야 뒤늦게 구입했는데 첫째도 같이 잘 보니 이보다 더 유용할 수는 없지 않나? 발화 수준은 비슷 해도 26개월 먼저 살아낸 첫째의 어휘력과 발음명료도는 사뿐히 둘째를 넘어선다. 대신 둘째는 수다쟁이가 낳은 수다쟁이 딸답게 대화의 ‘핑퐁력’ 그러니까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천재다. 둘의 강점이 같이 버무려지면 진짜 맛있는 비빔밥이 된다. 말 잘하는 첫째를 시샘하다 못해 자지러지는 둘째가 이 집에는 없다. 비등비등한데 또 다른 매력이 있어 너네 둘 참 매력 있는 남매다. 하나하나 이렇게 곱씹다 보면 쌍둥이 키우는 기분은 또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육아맛집이 여기네!


오빠, 여기 앉아
이거 오빠꺼, 이거 내꺼


끊임없이 들이댈 수 있는 동생이 참 고맙다. 말 폭발기에 조금씩 근접하는 동생은 그 폭발기를 사실상 마주한 적 없는 오빠에게 끊임없이 ‘작업을 건다’. 동생이니까 가능하다. 한 핏줄이니까 들이대다가 거절당해도 소위 '마상 (마음의 상처)' 없이 다가갈 수 있다. 느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모두 희망한다. 우리 아이가 또래 세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를... 신경다양성 그룹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모든 친구들 곁에 함께 머물 수 있기를! 동생은 그 희망이 중심에서 오빠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시킨 적도 없건만 냉큼 나서 리허설을 시키는 조교 그녀. 본인의 반응에 콧방귀도 안 뀌면 눈을 볼 때까지 쫓아다녀준다. 웬만한 치료실 못지않은 딥한 상호작용이 여기 있다. 동생 선생, 거참 용하지 아니한가?


우당탕탕, 왁자지껄,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우리 같이 걸을까


53개월과 27개월. 나는 이 둘의 8살과 10살, 학교에 막 함께 다닐 무렵을 뭉게뭉게 상상한다. 사춘기로 한참 예민할 게 분명한 15살과 17살은 또 어떠려나. 나아가 성년이 된 20살과 22살, 각각 서른쯤에 맞닿은 28살과 30살을 가끔씩 그려본다.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낯설어도 동생만큼은 예뻐할 줄 아는 첫째는 어떤 눈빛을 하고 둘째를 바라볼까. 오빠한테 무한정 들이대는 둘째는 신경다양성 오빠에게 차차 어떤 류의 소통을 시도해 나갈까. 서로의 힘든 마음은 어떻게 의지하며 나눠갈까. 그건 정말 가능할 수 있으려나?


두 살 터울이지만 쌍둥이 기분이듯, 발달격차가 점점 더 벌어져도 인생 걸어가는 보폭마다, 나란히 나란히 서로의 결을 맞춰갈 수 있는 여유는 탑재했으면 좋겠다. 누구 한 사람의 발자국만 무겁게 찍히지 않기를, 발걸음의 무게가 신경다양성이라는 추를 달고 인생 더 심각하게 느끼지 않기를! 외동딸 엄마는 너네 둘의 어깨가 맞닿은 쌍둥이같은 순간들을 그 누구보다 진짜 사랑했노라고. 언젠가 청년기의 두살 터울로 부쩍 뛰어올라올 때쯤에도 고 느낌 고대로 서로의 세계를 두드릴 수 있기를 진짜진짜 바란다. 땅땅!


두 살 터울이지만 쌍둥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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