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푸른 신경다양성 세계]
이럴 거면 나오지 말 걸 그랬지
다음부턴 그냥 집콕하자
보통 아이랑 외출할 때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일까? 외출복 착장 다 마쳤는데, 나가기 직전에 아이가 타이밍 적절히 신호를 주어 기저귀를 또 갈아야만 하는 상황. 모처럼 남이 해주는 밥 좀 먹겠다고 식당에 갔는데 돌아다니는 아이를 앉혀야만 해서 핸드폰을 꺼내주는 순간. 걸음마에 맛 들인 아기의 종횡무진에 끝도 없이 잡으러 다녀야 하는 순간. 좋아하는 장난감 가게 지나다가 최애핑 마주쳐서 집에 수많은 핑핑핑들이 있음에도 핑을 또 하나 들여야 하는 상황. 집에 가서 저녁 먹을 타이밍인데 절대절대 안 간다고 더 놀다가 거라고 떼쓰는 상황. 적다 보면 사실 이 한 바닥도 거뜬히 다 채울 것 같다. 아이랑 외출하는 건, 정말이지 만 38세 인생에서 고난도 탑 쓰리다. 외출해서 뭘 특별히 하지 않아도 일단 나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아이랑 지지고 볶을 일이 많다.
'신경다양성' 아이와 외출은 어떠할까. 아이랑 밖에 나가는 일과를 앞에 두고 수많은 엄마 아빠가 눈물콧물 다 흘리지만, 자폐스펙트럼 장애, 주의력결핍과잉행동 장애, 불안 장애 등의 진단 이름표를 가진 아이들은 조금 더, 아니 뭘 상상하든 그 이상 어려울 때가 많다. 외출 난이도 격차가 각양각색이지만, 함께 손 잡던 엄마아빠가 아이 통제하다가 땀으로 흠뻑 젖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 눈칫밥 먹느라 마음도 지쳐버리기 일쑤. "아, 이럴 거면 다음엔 그냥 나가지 말자" 한숨 푹 쉬어주고, 마음으로 탁 정해버린 채 콧바람 쐬고 싶은 외출 소망 따위 켜켜이 접어서 묵은 서랍에 넣어두기가 쉽다.
뭐가 그렇게 어렵냐고 물으신다면? 첫째, 새로운 공간에 들어설 때 불안과 긴장이 높이 올라오는 경우, 백화점이고 마트고, '일단 나 저기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는 경우가 많다. 공간 전환이 쉽지 않은 것. 자폐스펙트럼과 ADHD 아동의 경우, 감각이 예민한 친구들도 많은데 광활한 공공장소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볼륨 높은 음악이나 번쩍거리는 조명 자체가 견디기 힘든 공포자극이 되기도 한다. 반대로 평소와 다른 시청각 자극에 흥분해서 방방 뛰며 각성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이건 “얘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엄마 말 좀 잘 들으랬지” 같은 잔소리로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이도 힘든 상황이라는 걸 알아야 그때서야 좀 끄덕여진다.
사례는 너무 다양하지만, 이것만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일단 외출하면 '신경다양성 아이를 요란하게 자극할 만한 뭐가 너어어어무 많다'는 것. 가끔 나도 귀를 틀어막는데 아이는 오죽할까! 어떤 구체적인 진단명에 해당하든, 낯선 자극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아이들에게 '외출'은 늘 도전이다.
아이와 그 무지막지한 초고난도 미션을 감행할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쇼핑'. 쇼핑이야말로 만만치 않은 미션의 연속이다. "마트에서 꼬깔콘 하나, 월드콘 하나 사와" 따위의 명명백백한 단순한 구매행위 말고, 진짜 고민 끝에 득템 하는 초고난도의 '쇼핑'을 말하는 거다. 신경다양성 세계에서 자폐스펙트럼 아이들은 딱딱 떨어지는 구조화된 상황이 익숙하고 편하다. 그러니까 매일 특정시간에 그 장소에서 그 행동을 하고, 그다음은 어떻게 하고, 정해진 시공간에서의 틀에 박힌 '그 스케줄'을 따르는 게 순조롭다는 이야기.
그런데 쇼핑이라는 건 첫 단계부터 난제다. "이거 살까, 저거 살까, 여기서 살까, 저기서 살까" 공간을 좀 돌아야 되고, 돌아보다가 "어? 저거 괜찮지 않아?" 갑작스럽게 꽂히는 선호템도 수시로 생긴다. 예정되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만한 물건이 보일 때 우리는 기꺼이 들어가서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정해두지 않았던 질문도 던져야 한다. 그런데 그때 사람이 많으면 기다리기도 해야 한다. 그렇게까지 탐색했는데 그래도 마음 한켠이 좀 찝찝하면 "좀 더 돌아보고 오겠다"고 우회적인 거절도 한다. 쇼핑은 정말이지 의사소통과 눈치가 어우러진 종합예술이다. 단계단계 쪼개보니 모호함으로 점철된 고난도 미션이다. '와, 나 도대체 쇼핑 어떻게 했던 거야?'
첫째 아이랑 운동화를 사기까지 총 두 차례 백화점에 방문했다. 처음엔 아이가 신발매장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동선회로가 꼬였던 모양. 소위, 텐트럼을 꺼내들랑말랑 하기에 무리하진 않았다. '나이키에서 흰색 찍찍이 운동화를 산다'와 같이 정확하고 간결한 입력값 없이 쇼핑을 하는 건 아무래도 아들한테는 연습이 필요한 지점이다. 정확한 매장 목적지 없이 핸드폰과 지갑 들고 살랑살랑 구경 다니는 게 첫눈에 곱게 보일리가 없지. 동생 신발만 잽싸게 쇼핑 성공. 신발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내 몸짓을 견디다 못해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내가 먼저 소리 질렀다 "됐어 됐어 너 좋아하는 스타벅스로 가" (아들은 여신 로고와 시그니처 색 분명한 스타벅스를 매우 좋아한다)
우리 애는 연습만 하면
잘할 수 있는데요
두 번째 방문은 좀 해볼 만했다. 역시 '구운몽' 별명다워. 같은 층에 올라서 며칠 전 봤던 매장을 도니, 신발 매장들을 휘감는 음향도 조명도 아이 머릿속에 구조가 좀 잡혔구나! 생각했다. 동생이 미리 사본적이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적당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그림이 대충 상상이 됐을 거다. 그렇다. 우리 애는 같은 장면을 몇 번 연습하면 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쇼핑은 정말이지 어렵다. 각각의 매장에 들어가서 신발을 이거 신겼다가 저거 신겼다가 입력값을 자꾸 바꿔대는 엄마가 마냥 편할 수는 없었겠지. 180이 맞는지 190이 맞는지 사이즈도 확인해야 하고, 워낙 점프점프 많이 하는 애라서 뭐가 더 쿠션감 좋은지, 너는 무슨 색이 더 끌리는지 확인할 게 많은데 애는 자꾸 도망가서 데려와야 하고 자기 신발도 아닌데 신었다가 저 멀리 던지기도 하고 이 순간 진땀의 주인공은 나야 나. 그래도 잘 골라야 하니까 끈기 있게 그 어려운 미션을 이어간다. "이리 와봐. 이거 신어봐"
결국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골랐냐고? 당연하지. 별명이 구운몽인데 아홉 번까지도 가기 전 두 번만에 수월(은 아니지만 어쨌든 큰탈 없이 무난)하게 쇼핑했으면 꽤나 성공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두 눈에 콕 담은 신발이고 뭐고, 마음에 드는 ‘매장’을 골랐다. 아이가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장난치는 통에 눈살이 찌푸려질 법도 했지만 "뭐가 좋아?" 다정하게 물어보는 직원의 친절한 말투를 사고 싶었다. 진지하게 신발을 고르는 사이, 아이의 산만함이 싫어 쓱 자리를 뜬 직원은 얄미웠고, 아이가 쉴 새 없이 자기 말만 하면서 신발을 거칠게 툭툭 신고 벗고 하자, "죄송하고 감사하다"고 표현한 내 말도 못 들은 척, 냉랭하게 뒤돌아 툴툴거린 직원의 태도에 무안했으니까.
하루가 다르게 발이 자라는 애들이라 내가 대충 사이즈 짐작하고 사 신기기도 모호하다. 아무리 새벽배송이 있어도 신발만큼은 뭐가 착화감이 좋은지 신어보고 사야 안전한 템 아닌가. 그래서 어려운 줄 알면서도, 때론 기분 상할 걸 알면서도 눈 딱 감고 힘들 줄 알면서도 또 감행한다. 하고 또 하다 보면 결국 그 나름의 익숙한 패턴이 생겨주겠지. 다만, 우리 애 공간기억력 우주최강인데 내가 택하지 않은 신발가게는 우리 애도 다시 안 갈 것 같다는 건 안 비밀하겠다.
신경다양성 아이와 집 밖으로 향할 땐 직종불문, 업종불문 불현듯 웃어주는 직원이 여럿 있었으면 좋겠다. 소소한 타인의 미소에 신경다양성 세계를 무던히 버틸 근육이 생긴다.
자폐 스펙트럼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적소 구축에서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감각입력의 조절이다. 뛰어난 지각처리 능력 때문에 많은 자폐인들은 소음, 조명, 촉각, 냄새, 맛 등과 같은 감각 자극에 극도로 예민하다. (중략) 자폐인들의 강점, 재능, 능력을 아는 것은 사회성의 연속선 거의 끝쪽에서 작동하는 기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존중과 이해를 위한 강력한 논거가 된다.
토머스 암스트롱, <증상이 아니라 독특함입니다 (The power of Neurodiversity)>,
p.114-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