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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현 Apr 01. 2019

누가 내 쿠키를 태웠을까

카페 덕후의 카페 사용 설명서

3월의 마지막 날, 쿠키를 구웠다. 그냥 쿠키가 아니라, 결혼 100일 차 기념일 쿠키. 남편을 위한 고가의 선물도 고려해볼 만하겠으나 빵순이, 카페 덕후에겐 커피와 어울릴 쿠키 생산 공정에 돌입하는 게 더 어울리는 듯했다. 기념일이라는 것이 담고있는 상징적인 매력, 남들 눈에는 당사자들만의 오그라들 것 같은 이벤트일지라도, 평범한 날들의 연속에 그나마 작은 설렘을 보탤 수 있는 최적의 타이밍 아니던가. 이왕 특별하게 기억하기로 한 날, 최대한 예쁘고 앙증맞은 모양새로 부부만의 기록에 귀염성을 더하고 싶어서 특별한 준비물 공개! 한국에서 보스턴까지 고이고이 모셔온 '아품토', '아품곰' 틀을 꺼내놨다. 줄임말을 풀어보자면, '아몬드를 품은 토끼'랑 '아몬드를 품은 곰돌이'. 버터에 설탕을 더하고, 노른자와 정성 들여 친 가루까지 더해서 마음을 들여 토끼와 곰돌이를 찍어냈다.


꺅, 예뻐 죽겠어.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귀엽잖아

벌써부터 이미 기념일 쿠키는 #성공적 #로맨틱. 봄비 내리는 보스턴, 그 얌전하고도 고즈넉한 정경에 취하고 고소한 버터 냄새가 물들어가는 우리 집의 분위기에 취하고. 그 안에 나와 남편도 덩달아 로맨틱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기분 좋아 둥둥. 이만하면 3월의 마지막 날, 봄날 참 마음에 들지 싶었다. 허나 평화로운 오후 풍경은 딱 여기까지.


앙증맞은 모양의 아이들을 빚어내고 잘 구워지길 기대하는 마음. 바삭한 식감에 설렐 그 순간을 상상하며. 쿠키들 오븐 입장.


우리가 눈치채야만 했을
나와 당신의 '타이밍'에 관한 이야기



 "이거 혹시 탄 냄새 아니야?"

눈가가 찌푸려질 정도로 탄 냄새가 차오르기 시작해서야 돌연 남편과 내가 벌떡 일어섰다. 어머머. 쿠키 어떡해. 버터향과 시나몬 향까지 얹힌 고소한 쿠키 반죽에 '오도독' 아몬드까지 꾹꾹 정성 다해 박아뒀는데, 알차고 실하게 퀄리티를 높여놓으면 뭐하나. 정작 타이밍을 제대로 놓치고야 말았다. 격하게 분노 담아 '완전 제대로 망했다.' 혹여나 쿠키들이 제자리를 잃고 넘어질까 봐 조심스럽게 양손에 바짝 힘을 주고 오븐에 안착시켰으며, 너무 한 번에 바싹 익어버릴까 봐 아주 높지는 않은 온도로 천천히 군데군데 꼼꼼히 익혀야지 따져보며 15분 정도 타이머까지 돌려뒀던 건 기억이 나는데, 하지만 노력은 딱 거기까지. '세심함'을 더할 거라면 끝까지 그 정성을 보였어야지, 나 너무 무심했다.


삑삑, 삐비빅. 오븐은 설정한 시간이 다 되었음을 꾸준히 고지했지만 '타이머의 설정시간'이 끝나면 오븐도 멈추겠지, 라고 단순히 생각했던 게 결정적 실수였다. 아직 작동법에 채 익숙해지지 않은 초보새댁은 가전제품에 무한 신뢰를 보내고 말았던 것. 신혼집의 오븐은 정확히 일곱 차례 씩이나 신호음을 울려댔지만, 나는 태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저 오븐 참 끈질기네. 굽굽작업이 끝났는데도 계속 알려줘"라고 중얼거리며. 쿠키는 완성됐고 이따 열어보지 뭐. 순진한 생각이었다. 맛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점점 먹빛이 돌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냄새가 향긋하다? 어? 냄새 점점 찐해지네. 뭐야. 버터 왕국에 온 것 같아. 어? 점점 타는 것 같은데? 그렇다. 우리의 기념일 쿠키는 그야말로 완. 벽. 하. 게 새까맣게 타버리고 말았다.


"너희들이 찐한 풍미 가득한 초콜릿 쿠키였다면!"


끊임없이 신호는 있었다
내가, 우리가
가뿐히 외면했을 뿐


오븐은 그저 가지고 있는 타이머 기능을 충실히 돌렸을 뿐이었다. '오븐, 저 말입니다. 저 시간 다 되면 이만 퇴근하겠습니다'라고 말한 적 언제 있었단 말인가. 나는 뭘 믿고 (오븐을 믿고!!!) 오븐이 시간 다되면 제 알아서 칼퇴근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종료하기로 예정된 시간이 끝나서도 그토록 힘줘서 일하고 있을 줄 까맣게도 몰랐다. 성실한 오븐은 쿠키를 익히는 몸짓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렇게 끊임없이 쿠키의 겉면을 데우고 또 태웠다. 착실히 제 임무를 수행한 셈. 오히려 너무나 근면해서 탈이었다. 타이머가 울리면 익히는 기능도 함께 자동 종료되겠거니 믿었던 나는 "이건 오븐의 배신이야"라고 부르짖었지만, 탄 쿠키의 흔적이 억울해서 외친 비겁한 책임전가의 언어였을 뿐.


진짜 망친 주범은 오븐 앞에서 게을렀던 나, 신호음을 받았음에도 명확히 반응하지 않고 대충 '알겠어. 알겠다고' 오만했던 나였다. 완성작을 이룰 모양새와 설탕의 그램, 버터의 적절량 투입과 고른 반죽, 반죽에 가 닿는 팔힘 따위에나 신경 썼지, 넣어두면 제 스스로가 시간을 조절하리라 기대가 너무 컸던 내 탓. 기대가 잠재되어 있었더라도 한번 더 살피지 않아 화를 자초한 '그야말로 내 탓'


아품곰, 아품토, 너희들의 해맑은 표정만큼이나 들떴었던 작업 현장. "우리를 지켜주세요. 제발"


타이밍 놓치면
이렇게 무서워지는 거라고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뒤늦게라도 탄 냄새에 우리가 반응할 수 있었기에. 요란한 신호음에도 청각을 놓아두었던 나와 남편은 다행히도 용케 발달한 후각 덕분에 새까만 쿠키 조각들을 뒤늦게 구조했다. 베이지 빛깔의 뽀얀 속살들을 살리지 못했으나 형체는 건져냈고 먹지 못할 테지만 방긋 웃고 있는 쿠키 표정만큼은 살려냈다. 덩달아 위급상황에 놓일 뻔한 부엌도 전사처럼 구해냈다. 화재감지기라도 돌았다면 얼마나 더 아찔했을까. 그것도 여전히 낯설기만 한 타국에서! 결혼 100일을 맞아 타이밍 맞춰 예쁜 쿠기 굽던 나는, 타이밍 놓치고 최고로 안 예쁜 하루로 이날을 기억할 뻔했다.


다크 초콜릿 쿠키라고 우기고 싶을 만큼 (혹은 브라우니라고 우기고픈) 까맣고 단단한 돌덩이가 되어버린 기념일 쿠키. 남편과 나는 몰라보게 변장해버린 토끼와 곰돌이 모양의 쿠키 친구들을 사진으로 정확히, 제대로 찍어두자고 했다. “타이밍 놓치면 이렇게 무서워지는 거라고. 위험해지는 거라고.” 조금만 일찍 벌떡 일어나 오븐을 향해 달렸다면, 우리가 기대한 오늘의 결과물들을 이토록 '망쳐버리진' 않았을 거야. 둘 중 하나 누구라도 시끄럽게 울려대는 타이머 소리에 초예 민하게, 짜증스럽게라도 반응했다면 잠시 신경질을 났을지언정, 엉성하고 어이없는 결과물에 이토록 '멍'해지진 않았을 텐데! 생각도 못한 당황스러운 잿빛에 한번 빵. 서로 쳐다보고 '이걸 어쩐담' (정확히 표현하자면, 평화로운 휴일 오후, 도대체 우리 이게 뭐하는 짓이지?) 안쓰러운 미소가 겹쳐서 또 한 번 빵 터지고 만다.


"저희는 (주인도 의도치 않았던) 쿠키 삼총사입니다. 브라우니 같겠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하네요."


쿠키 한번 제대로 태워봐야,
뭔가 잘못되었었구나
깨닫게 되는



신호를 무시하다가 큰코다치는 경우, 어디 새까맣게 타버린 쿠키뿐일까. 살면서 무수히 많은 경고음을 듣지만, 들었어도 움직이기 귀찮아서 무시하거나, 움직이려다가도 중간에 잠시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느라 타이밍을 놓쳐버릴 때가 허다하다. "(1) 삐비빅, 지금이에요. 움직이세요!" --> "(2) 혹시, 못 들으셨나요? 당신이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 되었어요" --> "(3) 더 늦으면 후회할 거예요. 삑 비비빅. " --> "(4) 제가 이렇게까지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로 지금 당장 뭔가 해야만 해요. 당신!!!"


일상 속에서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면 청각으로든, 후각으로든 우리에게 경고하는 메시지는 오감 어딘가로든 찾아오고 있을 테다. "이 회사 문제가 많습니다. 직장인 당신, 제발 오늘이라도 움직이세요. 달려 나가시라고요" 또는 "정신 차리세요. 이 남자는 당신을 보기 좋게 이용하고 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연결고리를 끊으세요!"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그 언젠가, 움직이면 된다고만 생각하다간 당신의 '쿠키'도 바싹 말라, 볼품없이 완전하게 깡그리 타버릴 지도! 요란한 삑삑 소리에도 "내 쿠키가 안녕하리라" 믿는 건, 무슨 배짱인 거지. 쿠키 한번 제대로 태워봐야, 뭔가 잘못되었었구나를 깨닫게 되는 세상만사의 진리. 기억해야 한다. 신호가 오면 움직여야 한다는 것. 내 안에서 형편없이 타버린 쿠키에 빚어냈음에 번뜩 놀라기 전에 말이다.


정성스레 빚어내는 '만듦새'만큼이나 우리가 지켜야 할 '타이밍' 그 순간은 소중하다는 것


누가 내 쿠키를 태웠을까.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서. "누가 내 쿠키를 태웠을까." 오븐의 탓일까. '저에게는 '타이머' 기능은 있지만 자동 꺼짐 기능은 없습니다'라고 한국어로든 영어로든 정확하게 고지해주지 않은 가전제품 너란 녀석의 탓은 정말 아니었을까. 혹은 "여보, 저거 자꾸 소리 울리잖아. 괜찮은 거야?"라고 말해주지 않은 남편, 삐비빅 요란한 경고음을 함께 나와 하나가 되어 '부부는 일심동체' 모드로 방관한 남편의 탓일까. 아니면,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도 빙그레 웃고만 있는 얼굴, 온도가 계속 뜨겁다고 그렇게까지 뜨겁게 타버릴 일인가. 쿠키 너희들의 탓? 이건 더더욱 아니겠지. 수차례 오븐, 그가 제 역할을 다했다고 부르짖는 아우성을 가벼이 모른 척했던 '완전한' 나의 탓.


나는  믿고 그토록 오븐의 경고를 무시했을까. 최선을 다해 성실한 자세로 긴박한 신호에 귀는 기울였으나 '움직이지 않았음' 후회한다. 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고도 어쨌든 ' 쿠키' 무사할 거라고 낙관했던 파워 긍정의 힘을 반성한다. 그토록 단순한 함수마저 풀지 못했음에 머리   . "아니라는 신호가 왔으면 움직여야지." 당연한 진리에 탑승하지 못한 나의 온몸에  냄새, 오늘의 연기가 그득히 들어차기 시작했다. 고소했던 버터향이, 좋아하던 시나몬 향이 그냥 ' 냄새'  가려졌다. 마음을 다해 정성 들인 향의 모든 요소가 타이밍을 놓친 탓에  순간 지워졌다. 그저 억울했다.


그나저나   쿠키들은 어떡한담. 카페에 들러 쿠키들을 마주할 때마다  태워버린 쿠키가 생각나 애도할 것만 같았다. 아까워서 눈물이 주룩주룩 흐를 지경. 타이밍을 놓치면 마음을 다해 빚어낸  솜씨마저 검게, 잿빛으로 검정이 되어버리는 이다. 여러분의 오늘 하루에는 '' 쿠키가 없기를. 아니, 태우더라도 조금만  태우시기를.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봄날의 아품토, 아품곰. 4월의 첫 자락 귀요미들과 함께 아깝고 억울한 맘 뒤로하고 냠냠.
"뭘 꼼지락 거리시나요. 신호음을 들었다면 지금 움직이셔야죠"
당신의 아품곰, 이 순수하고 앙증맞은 미소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꼭 기억해야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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