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덕후의 카페 사용 설명서
오늘 오후는 창문이 활짝 열린 테라스 석에 앉았다. 보스턴 기온 87도. 화씨를 섭씨로 변환해보자면 31도 정도의 날씨. 한국도 34도를 넘어서면서 폭염경보가 발령됐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접했는데 이곳도 여름은 여름인가 봄. 그토록 매서운 추위가 끝날 줄 모르던 이곳도 결국 계절의 흐름, 시간의 변화를 거스르진 못하는 거였다. 추위를 지독하게 타는 나는 이런 더위가 차라리 좋았다. 날씨가 더워질수록 냉방의 강도가 세지기 마련이라서 실내보다는 바깥 자리가 더 마음에 든다. 훈훈한 열감이 햇빛 타고 그대로 내려앉아서 의자도 뜨끈뜨끈하군. 냉방 안 되는 야외석은 인기가 없는지 사람이 없어서 마음에 더 든다.
좋아, 오늘은 이 자리 찜
유학시절, 수업이 끝나면 대개 카페나 도서관 행이었다. 잠시 그날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공부해야 할 자료들을 하나하나씩 소화시키는 시간. 아마 이 지점이 하루의 가장 난제인 것 같다. 보스턴 중심에 위치한 규모가 큰 공공도서관에 갈지, 집 근처 자그마한 마을 도서관에 갈지, 카페로 방향을 튼다면 진한 커피맛이 일품이라 오늘의 피로를 최적으로 달래줄 곳에 가야 할지, 혹은 조명이 너무 예뻐서 공부하고 싶어 지게 만드는 공간으로 가야 할지, 내가 자리할 영역을 고르는 데 이어지는 고민은 진정 끝이 없다.
목적지를 고른 뒤에도 마찬가지. 손님이 많을 땐 빈자리 하나라도 나는 즉시 고민하지 않고 일단 선점하고 보겠으나, 앉은 사람 드문드문 제법 선택지가 많을 땐 내 오후 시간을 쾌적하게 채워줄 그 자리가 과연 어디여야 할지, 마음을 정해야 한다. 이왕 커피값도 지불했는데 마음에 쏙 드는 자리에서 만족할 만한 집중도와 생산성을 몸소 느끼고 자리를 떴으면 좋겠다. 한마디로 '본전'을 잘 챙길 수 있는 자리를 찾아 분주하게 눈을 돌린다.
자주 가는 카페가 생겨나면 늘 앉게 되는 ‘단골 자리’가 생겨나기도 하는 법. 미드에서도 주인공이 늘 찾던 카페, 앉던 자리에 앉곤 하는 장면을 자주 본다. 나 역시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기보단 했던 걸 그대로 현상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 '아이스크림 같은 맛'을 고르는 심리와도 비슷하겠다. 늘 먹던 '민트 초코칩'이 안전한 선택인 걸 머리는 이미 알고 있다. 새로운 맛 시도를 해볼까 망설여도 결국엔 내 입이 단골 맛을 조음 해내고 있다. 카페나 도서관 자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좋았던 자리만 자꾸 가게 되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다. 이왕 그 공간에 들어섰다면 그 자리도 꼭꼭 비어있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떠올리며 또각또각 걸어간다.
그러고 보니 자주 만나는 공간, 찜해둔 자리를 만나는 건 마치 '베프'랑 수다 나누러 가는 심경과도 닮았다. 피곤한 마음을 힐링할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날 만나려 기꺼이 나만을 위한 시간을 내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참 '예쁘다.' 의자의 가지런한 자태마저 참 예쁘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매일 '자리 고르기'라는 난제에 빠진다. 예민함의 정도에 따라 '어디 앉으면 어때' 내버려 둘 수도 있겠으나 때때로 좀 불편한 자리에 앉으면 그 여파가 꽤 오래간다. 책상과 의자, 내가 앉은 공간의 조명 강도와 햇살의 노출 정도, 어느 하나 삐걱거리면 얼굴의 찡그림도, 마음에 생기는 주름도 선명하게 남는다. 오늘 자리 찜의 실수가 내일 자리 찜을 위한 교훈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은 조금은 다행인 부분. 그렇게 그렇게 일상을 반복하며 마음에 드는 단골 자리를 고르고, 끊임없이 자리를 찜하고 그 자리를 마침내 또 만났을 때 반가워한다. 생각지 못했던 자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을 땐, 뜻밖의 발견. "이 자리 너무 괜찮다"고 새로운 도전을 칭찬하고 점점 더 정 들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똑같은 카페에 가도 마음에 안 드는 자리에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춘 날엔 결국 오래 집중하지도 못하고, 더더욱이 커피만 몇 모금 들이킨 채 '뭘 해야 할지' 어물쩡 앉아있다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나온 적도 있었다. 기차에서도 전철에서도 늘 그랬다. 몇 분 버텨내기만 하면 어차피 내릴 거니 그리 예민할 필요 없겠지만 이왕 어딘가 장소에 갔다면 단 10분이라도 몸과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을 수 있는 '내 자리'에 앉았으면 좋겠어서 은근히 공을 들인다.
더불어 공간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과 은근히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들. 자리도 중요하고 자리의 기운을 같이 붙잡고 있는 사람도 중요하다. 옆 자리에, 앞 자리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자리 '변수'가 생겨나니까. 자리만 찜했을 뿐인데 예상치 못했던 자로부터 기운을 선물 받기도, 하루 바이오리듬을 완전히 망쳐버리기도 함은 말해 무엇하리.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아 '나'를 무럭무럭 키워나가고 끊임없이 힐링해나가는 과정. 그러고 보니 내 자리를 '찜'하는 건 결국엔 내 사람을 '찜'하고 건강한 소통을 해나가는 작업과도 유사했다. 남들이 좋다고 찜해둔 자리라고 내 마음에도 콕 와서 닿을 매력을 보장해줄 순 없는 법. 오랜 전통, 풍수지리에 근거해 '좋다는' 자리에 앉아도 내 몸 피곤하고 마음이 치유가 안되면 소용이 없다. 내 마음과 내 기운이 편안해질 수 있는 자리, 아무리 오래 앉아있어도 몸의 근육이 뻐근해지지 않을 수 있는 안락한 내 자리를 잘 찾아내야지. 평생 베프 엄마 곁에 앉듯이, 언제나 내편일 남편 곁에 앉듯이. 아무 데나 앉을 수야 있지만 아무 데나 앉기 싫은 이유. 최대한 마음을 채워줄 자리를 골라 앉고 싶은 이유, 결국 내 사람 곁에 앉고 싶은 마음과 다를 게 없었다.
내일 비가 온다면, 어느 자리가 좋을까. 오늘과 같은 이 자리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주인이 예민해서 빗방울이 들어차는 걸 참지 못하고 테라스 창문을 닫아버린다면 비의 냄새를 더 가까이에서 맡을 수 없어 조금은 아쉽겠으나 그럭저럭 괜찮을 것도 같다. 창문에 송골송골 맺히는 물방울 보는 재미도 쏠쏠할 테니 (정말이지, 비가 오는 날엔 강수량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꼭 창가석에 앉아야 함을 추천한다.) 기분의 울적한 농도가 짙을수록 물기 머금은 창가는 힐링 효과가 있다. 촉촉한 기운이 내 우울감마저 씻어주는 효능이 있을 것 같아서 과학적 근거 전무한 내 논리에 따라 물방울을 느끼려 앉는다. 창문이 열려서 빗방울이 톡톡 튄대도 좋다.
단, 쓸데없는 생각들이 많이 떠오르는 걸 제어하고 싶다면 되도록 풍경이 덜 보이는 안쪽 자리에 앉아 카페 조명에 머리와 마음을 맡겨둔다. 다소 어둑어둑한 카페를 찾아들어가 붉은 조명 하나만 덩그러니 탁자에 떨어지는 곳에 조심스레 앉고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한다. 풍경이 예쁠수록, 매혹적일수록 마음 역시 바깥의 빛과 바람결에 따라 흩어지기 쉬운 법이다. 마음 소모가 두려운 날이라면 깊숙한 곳, 최대한 안쪽 자리를 찾아 앉고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두기.
테라스 석에서 두 시간째. 냉방하는 안쪽 자리와 분리된 자리에 앉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팔뚝이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몸에는 선크림을 하나도 바르지 않고 나왔지만 하루정도 햇빛에 살짝 그을려지는 느낌은 적당히 기분 좋다. 햇살이 뜨거워서 얼굴을 잔뜩 찡그려야 할 만큼 마냥 싫은 날도 있지만, 햇살이 뜨거워서 몸도 마음도 풍성히 익어가고 부풀어 오르는 듯한 반대 감정을 느끼는 날들도 있으니까.
내 마음과 바디오 리듬에 맞춰 내 자리를 고르는 일, 마음의 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유연하게 앉을 곳을 바꿔주는 일은 제법 산뜻하다. 내일은 어디에 앉아볼까. 어느 카페 자리를 온 정성 다해 '찜'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