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로맨스의 기원

by Ellie

교내에 녹음이 푸르게 우거지던 어느 계절이었다. 당시 교양으로 듣던 인간과 사상 수업 교수님께서는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잠시 머리도 식힐 겸 간단한 발표회를 가져보자고 하셨다. 주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 자신의 생각을 A4 반장 분량으로 가볍게 정리해 오는 것이 과제였다. 참고 문헌이나 자료를 고르는 것은 개인 재량에 맡겨졌다.




발표 당일. 우리는 교내의 작은 동산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각자 준비해 온 리포트를 꺼내 들고 차례대로 돌아가며 낭송을 시작했다. 자유 양식 리포트이다 보니 내용과 주제도 다양했는데, “멋진 남자를 만나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겉과 속이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며 모두를 향해 어드바이스를 하는 학생도 있는가 하면, “급식시절 내내 모쏠이었지만 이제 대학생도 되었겠다, 정식으로 연애에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요새 죽음의 다이어트 중이에요!”라며 힘차게 올해의 포부를 밝히는 친구도 있었다.


이 밖에도 운명처럼 시작되는 사랑, 어디선가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날 인연, 반려인과 한날 한시에 눈을 감는 낭만과 같은 다양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갓 성년이 된 여대생들은 무해무독한 표현들로 자신의 반쪽을, 소울 메이트를, 백마 탄 왕자를, 유니콘을 기다리고 있노라 고백했다. 그녀들이 꿈꾸는 로맨스에 대해 읊조릴 때마다 어디선가 작은 방울들이 바람결에 짤랑거리며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뱃 속이 간질거리던 이 날 수업의 해시태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 [#로맨틱성공적], [#희망적인], [#설렘]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묘한 찝찝함이 쫄래쫄래 뒤를 따라왔다. 프로그램 매크로처럼,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의 등장인물들처럼, 어디선가 강제로 입력되어 온 [사랑 환상 값]만 툭툭 뱉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섬찟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엔 별생각이 다 든다며 가볍게 무시하려고 했던 감상이었지만, 어느새 지하철 옆좌석까지 동승하여 내게 쉴 새 없이 이상한 질문들을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놈의 낭만적 사랑, 로맨스 타령이 시작된 건지 궁금하지 않아?”

“이성애를 바탕으로 한 연애의 개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인류의 기원과 함께 발생한 원초적 현상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현대물에서 그리는 로맨스와 과거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로맨스 양상은 확연한 차이가 있잖아?”


08.jpg


“로맨스는 중세 유럽에서 기사의 사랑과 무용을 다룬 이야기(Roman)에서 시작된 단어다. 사족을 좀 덧붙이자면 그때 당시에는 요즘과 다르게 기사들의 연정 대상은 지체 높은 가문에 시집 간 기혼 여성이었지. 연애를 통해서 결혼을 한다는 개념이 생겨난 건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아. 한국에 혼전 연애 문화가 전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건 120년 정도 됐으려나? 예전엔 연애와 결혼의 대상이 자연스럽게 이분화돼 있었어.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니 아버지가 정해주는 상대로, 연애는 술집에서 기생이랑.”


11세기 말 작품 「롤랑의 노래」가 실린 텍스를 공부할 당시 교수님께서 덧붙인 부연 설명이었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벙쪘던 학생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현대 시대에는 ‘불륜’이라고 치부되는 관계가 몇 세기 전만 해도 트-루 라브♡ 였다니?

내가 만약 사랑에 관한 개인적 단상 리포트 발표 시간에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엄마가 참하고 조신하게 제 말 잘 들으면서 대들지 않는 남자를 물색해 주신다면 일찍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전에 아찔아찔 두근두근한 연애를 위해 여름 방학 동안 러시아 여행 좀 다녀오려고요. 스트립 클럽 티켓이 저번에 소셜 특가로 떴길래 구매해 놨거든요. 제 첫 연애 상대가 너무 비싸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제 이상형은 스트립 클럽 에이스에요!”


아마 박수가 아니라 욕지거리를 받으며 자리에 다시 앉아야 했을 텐데.




이뿐만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기원전 1100년 ~ 기원전 146년)에서는 성인 남성과 소년의 연애를 '천상의 에로스'라고 칭했다. 이성 간의 결합은 자손 번식을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가 더 강했기 때문에 '세속의 에로스'에 불과했으며 진정한 정신적 사랑은 계급 차이는 나지 않되(귀족 성인과 귀족 소년) 나이 차이는 나는 동성 간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나이 많은 남성(가부장)이 디폴트가 되어 그가 나이 어린 남성과 관계를 맺냐, 아니면 여성과 맺냐에 따라 로맨스의 위계 서열이 정해진 셈이다.




앤서니 기든스는 그의 대표 저서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에서 서구 사회가 산업 혁명을 겪으며 일어난 일련의 사회적 변화들—자유주의 등의 근대적 가치 발생, 신분 사회의 붕괴, 과학 기술 발달 등—이 대중들의 성과 사랑 그리고 결혼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고 밝혔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부터 혼인 관계 형성 시 경제적 가치 외에 ‘정신적인 것들’이 고려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집단 내에서만 폐쇄적으로 향유되던 ‘로맨스’가 대중들의 영역으로 스며들었다. 기든스를 이를 보고 ‘대중들의 손에 닿은 최초의 문학 형식’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가 보통 감정의 보편적 요소로 생각했던 성, 사랑, 결혼이란 개념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특성과 관계를 달리해왔다. 즉 개인적 감정뿐만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따라 수시로 특징과 정의를 달리하는 '사회/문화적 산물'인 셈이다.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의 지적처럼 시대와 지배 규범에 따라 지속되거나 변형될 수도 혹은 사라질 수도 있는 사회적 관행의 하나인 것이다.


단지 현대 사회에서 사랑과 연애라는 것은,

• 혈기왕성한(주로 10대~20대, 혹은 30대 초중반까지)

• 비장애

• 미혼

• 헤테로(이성애자)

간의 전유물처럼 그려지고 있을 뿐인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정의인 것 같다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밤 10시 골든 타임 드라마에서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기혼 40대 레즈비언 여성의’ 연애 스토리를 본 적이 있는가? 언제나 그려지고 있는 것은 20대 미혼 비장애 헤테로들의 우당탕탕 심쿵 연애 스토리들이 아니었던가? 그저 메인 스트림의 주변으로 밀려난 하위, 비주류 문화 취급을 당할 뿐이다.


어쨌거나 여성은 고대 그리스에서건, 11세기 프랑스에서건, 봉건시대, 근대시시대 심지어 현대에서조차 남성들과의 관계 속에서나 비로소 사회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처지임은 한결같이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전 04화감춰진 능력 비용이 사랑의 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