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진 능력 비용이 사랑의 대가?

by Ellie
어떤 타인이 나를 전적으로 책임지기에는 나는
너무 비상하고, 까다롭고, 총명하다.
누구도 나를 완전하게 알거나 사랑할 수 없다.
오직 내 자신만이 나와 끝까지 함께할 수 있을 뿐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감춰진 비용과 사랑의 대가│


조금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랑에도 대가가 따른다. 연애라는 역할극을 통해 모종의 심적 위안을 얻게 되면 응당 그에 대한 비용을 치뤄야 한다는 얘기다. 감정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결을 쓰다듬을 수 없는 무형의 것들도 모두 나름의 제값이 매겨져 있는 세상이라 어쩔 수 없다. 구체적으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냐고? 다행히(?)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당신의 감정 기복과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부채처럼 빚지기만 하면 된다.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에 채무라는 개념을 가져다 붙인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가? 차라리 빚지는 느낌만 느끼고 말면 다행이게.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 사랑이란 모르핀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할 때 나타난다. 다른 누군가 없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는 단계인 관계 의존증이 발병되는 순간, ‘사랑에 취하는’ 탐닉 단계를 넘어서 정신적 손상을 감내하게 되는 중독 단계에 접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박에 가까운 의존증에 빠진 사람들은 좀 전까지 사랑이라 불리던 관계를 숙주와 기생체 관계로 변질시킨다. 여기서 숙주가 주로 담당하게 되는 일은 기생체를 가능한 한 오래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해 인지 부조화를 무시하며 자신의 감정 에너지를 쏟는 일이다. 그렇게 관계 채권자들에게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이용되는 채무자들의 행보는 거의 비슷비슷하게 끝이 난다. 또 다른 사랑(기생체)을 찾아 흐느적흐느적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는 사랑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가 되어 버리는 것. “외로워… 외로워…” 주문을 외듯 똑같은 말만 계속 중얼거리며 말이다.


02.jpg






│행복의 장치│


양극단으로 휘몰아치는 감정의 급류에서 한 발짝만 떨어져 나와 쌕쌕 거리는 숨을 고르다 보면 이런 질문이 슬쩍 고개를 들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목메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낸 놈들은 도대체 누구인 거지?" 시청각 자료를 통해 주입된 행복 스토리와 연출을 도대체 자신이 언제부터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때로는 신앙처럼 받들고 있었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 아무도 찾는 이 없이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쓸쓸히 눈을 감는 독거노인.

○ 커리어적으로 승승장구하지만 혼기를 놓쳐 밤마다 독한 위스키와 수면제로 외로움을 달래며 잠이 드는 싱글.

○ 이것저것 재는 것만 많아서 '누군가의 진정한 내면'을 보지 못한 채 외적인 것, 경제적인 면만 좇다가 뒤늦게 후회하는 비련의 서브 주인공.

○ 진정한 사랑이 담긴 키스를 받기 전엔 영원히 저주에서 깨어날 수 없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

○ 진정한 사랑을 시작하기 전엔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는 야수.

○ 국왕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해 독사과를 만드는 계모.

○ 왕세자의 사랑을 대신 받기 위해 이복동생을 우물에 빠뜨리는 언니..


대중문화와 미디어가 찍어낸 행복과 불행, 사랑과 불모의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와 연출들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다른 사람의 존재의 그늘 없이는 결코 달성할 수 없도록 꾸며 놓은 행복의 이미지는 얼마나 교묘하게 장치되어 있었던지.




만약 우리가 이런 얘기들 대신 아래와 같은 주인공들을 보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 은퇴 후, 한적한 시골의 초가집 기거하는 독거노인이 아기자기한 자신만의 텃밭을 가꾸고, 반려동물을 키우고, 취미 생활을 하며 소소하게 전원생활을 즐기는 모습.

○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는 커리어우먼이 밤이면 오피스텔에 차려 놓은 자신만의 미니바에서 좋아하는 브랜드의 위스키를 즐기는 모습.

○ 무턱대고 한 순간에 감정에 자신의 인생을 걸지 않고 이것저것 따지고 재던 여성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았던 지난 과거 속 자신의 모습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 내리는 모습.

○ ‘꿈 속 모험에서 진정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는 과제’를 수행하고 저주에서 풀려나는 숲 속의 공주.

○ 야수의 모습이지만 자신에게 선입견을 가지는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가 긍휼 정책을 펼치며 인심을 얻는 성주의 모습.

○ 국왕의 사랑을 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국왕보다 국민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는 것이 목표인 왕비.

○ 왕세자를 우물에 빠뜨리고 이복 동생과 함께 조정 실세를 휘어잡을 야망을 키우는 언니.




자신의 감정과 사고에 주도권을 잃게 만드는 구닥다리 서사들에 당신의 인생을 투영하지 말라. 타인이 나의 행복을 하드캐리해야 하는 구조에 ‘언제적 이야기’냐며 식상하다고 코웃음을 치자. 당신의 인생을 로코, 정통 멜로물이 아니라 TED,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와 같은 토크쇼에 소개되는 연사의 스토리라고 가정해보라. 네셔널지오그래픽과 같은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다뤄지는 위대한 인물의 성공사라고 생각해보라. 청중이 기대하는 것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당신이 무언가를 욕망하고, 도전하고, 실패했으나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덤볐던 스릴러를, 그리하여 결국 상처투성이인 손으로 그 무언가를 거머 쥔 숨막히는 서스펜스를 기대할 것이다.


당신의 삶을 로맨스로 한정 짓고 살아가기엔 당신의 꿈과 욕망은 너무 버라이어티하지 않은가?


09.jpg


이전 03화안방극장 여주의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