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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Feb 01. 2019

연애하면 더 예뻐진다더니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


잭 니콜슨 주연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As Good As It Gets, 1997>에 나온 대사이다. 아마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위의 대사는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이며 자기 자신밖에 모르던 소설 작가가 한 여성을 만나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로맨틱한 고백줄이다. 누군가를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든다니, 말 자체로도 로맨틱하다.  상상해보라. 자기 자신밖에 존재하지 않던 세상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낯선 이가 똑 똑! 경쾌하게 노크를 한다. 


“안녕하세요? 실례가 아니라면 저도 초대해 줄 수 있으신가요?” 


야구 배트를 한 손에 단단히 움켜쥐고 인터폰을 통해 사랑스러운 방문객의 얼굴을 실눈으로 내다보던 집주인의 심장이 쿵쿵 요란법석을 떨기 시작한다. 성안은 이미 온통 적색경보로 휩싸여 있다. 코드 레드, 코드 레드, 경보! 경보!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심박수 체크 요망!




‘당신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 내가 변했다’는 표현은 이처럼 달갑다. 하지만 여기서 누군가 '어떻게?'라는 물음을 던졌을 때 어떤 대답이 돌아오느냐에 따라 스토리의 장르는 상반되게 갈리기 시작한다.


• A 타입
“마음에 드는 짝남(짝사랑하는 남자)이 생겼어! 빨리 다이어트를 하고 피부과 관리 패키지를 끊어야겠어.”
“짝남이 야리야리한 청순 스타일 좋아한다는데 빨리 옷 쇼핑을 좀 해야겠어!” 
“아플까 봐 겁나서 미뤄왔던 시술을 받을 때가 된 것 같아… 이래서 연애하면 더 예뻐진다고 하는 건가 봐.” 

• B 타입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어! 내가 뭘 해주면 기뻐할지 궁금해. 같이 이런저런 걸 해보면 좋을 것 같아.” “그 사람의 관심사와 생각, 세계관이 궁금해. 어떤 캐릭터일까? 나와 잘 맞을까?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느낌이 안 들게 조금씩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겼을 때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그러나 이 설렘이 외모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지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자기야 나 살쪄도 지금처럼 예뻐해 줄 거야?”

“내가 나중에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 주름이 칙칙 늘어져도 지금처럼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야?”


이런 장난스러운 질문에도 얼핏 불안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자신이 젊음과 남자 친구의 마음에 ‘들었던’ 스타일을 잃게 되었을 때도 계속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다.


여자: 더운데 요즘 유행하는 숏컷으로 자르면 싫어할 거야?

남자: 안돼. 너는 긴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단 말이야.

여자: 뭐? 그럼 머리 짧게 자르면 나 안 만날 거야?

남자: 아니지~ 우리 공주는 뭘 해도 내 눈엔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근데 나는 공주 긴 머리가 더 좋은데… 아냐. 우리 애기 하고 싶은 대로 해~!


이런 대화에도 굴하지 않고 본인 결심했던 짧은 커트 머리의 스타일 변화를 감행한다면 상관없다. 덥다고 평소에 하던 화장을 하지 않았을 때, “이제 나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야? 화장 안 하고 나오는 빈도가 잦아졌네~ 물론 우리 공주 민낯도 예쁘지만.”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서도 신경이 단 1퍼센트도 쓰이지 않는다면 망설임 없이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자. 


하지만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되물어 보라. 자신의 자연스러움을 버리고 상대방의 눈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나은’ 치장을 한 결과가 진정으로 본인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더 예쁘고 보기 좋은 ‘여자’로 만들었는지를.


“원래 연애하면 더 이뻐진다고들 하잖아~”

“연애하더니 더 예뻐졌네!”


사람이 좋은 일로 분위기에 생기가 넘쳐 보이는 것과 단순히 남들이 보기에 외관상 예뻐 보이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다시 한번 묻겠다. 당신 정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아니면 더 예뻐 보이는 ‘여자’가 되었는가? 그것이 당신을 편하게 하는가 아니면 남들의 눈을, 남들의 심미관을 편하게 하는가?


남자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고 데이트에 나갔다가 발이 너무 아파 절뚝거리는 여자 친구에게 “신발 바꿔 신자”며 스윗하게 미소 짓는 남자 친구는 더 이상 멋져 보이지 않는다. “다시는 발 아프게 하는 신발 신지 마. 네가 편한 게 나도 편해. 짧은 치마도 입지 마. 다른 놈들 쳐다보는 게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유아틱 한 옷 입으면 네가 활동하기 불편해지니까 싫은 거야.”라고 말하는 남자 친구는 '예쁜 여자 친구'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덧붙이는 스토리는 몇 년 전 건너 건너 알게 된 지인과 식사를 하며 나눴던 이야기다.


얼핏 지나가면서 봐도 예쁜 외모와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던 여성분과 사적인 자리에서 술을 마시게 된 적이 있었다. 피팅 모델 일을 한다고 했던 그녀는 살이 찔까 걱정을 하며 안주로 나왔던 떡볶이를 젓가락으로 휘적거리고 있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지만 먹을 수는 없다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서. 술자리 이야기는 서로의 연애사로 흘러갔다. 자신처럼 모델 일을 하는 남자 친구와 3개월째 동거 중이라던 그녀. 이런저런 해프닝을 얘기하다가 우스운 농담을 한다는 뉘앙스로 다음처럼 말을 꺼냈다.


"벌써 같이 지낸 지가 3개월 짼데 아직도 내 맨 얼굴을 모른다니까요?"

"그게 가능해요??"

"남자 친구가 잠들기 전까지 깨있다가 걔가 잠들고 나면 그때 화장실로 가서 화장을 지워요."


평소에 착용하는 컬러 렌즈로 눈이 붉게 충혈이 돼도, 새벽 2~3시가 넘어도, 남자 친구가 잠들기 전에는 절대 잠이 들 수 없는 그녀. 새벽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머리를 만지고 다시 곱게 화장을 입는 일이다.


"제 맨 얼굴 보고 정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 나도 정 떨어지는데. 하하하."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술잔을 기울이며 웃었지만 나는 선뜻 분위기를 맞추는 웃음 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고통을 가벼운 술자리 농담으로 흘려보내는 것이 무언가 서글퍼졌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창 유행했던 노래 가사가 귓가에 맴돌았다.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보여줄게 훨씬 더 예뻐진 나. 바보처럼 사랑 때문에, 떠난 너 때문에, 울지 않을래…' 이별을 해서도 복수를 위해 ‘훨씬 더 예뻐져야’ 하는 여자들. 그 어디에도 마음과 몸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관계의 안전지대는 없는 것일까. 이래서는 사랑을 받기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보기 좋은 인형처럼 되는 것일 뿐일 텐데도.




글 초입에 언급한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에 나왔던 재밌는 대사 한 토막을 더 옮겨본다.


캐럴: (푸념하듯이) 도대체 나는 왜 정상적인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없는 거야....? 왜??

비벌리: (당연한걸 아직도 모르냐는 투로) Becasue it dosen't exitst. 당연하지. 애초에 그딴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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