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Feb 22. 2019

나와 하지 않을 일들

이상화되고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를 담은 미디어를 멀리할 것.
이런 이미지와 마주친다면 최대한 관심을 갖지 말 것.
자신을 미디어의 여성 이미지와 비교하지 말 것.
팻 토크(fat-talk)를 하지 말 것. 심지어 그 주변에도 있지도 말 것.
다른 여성의 부정적인 보디 토크(body-talk)를 부추기지 말 것.
다른 여성의 외모에 대해 말하지 말 것.
신체 모니터링을 요구하는 옷을 입지 말 것.
외모 위주의 SNS에 중독되지 말 것.
-「사랑은 사치일까」, 러네이 엥겔른  

Not-to-do list는 러네이 엥겔른의 '절대로 자신에게 하지 말 것들' 목록을 참고했다. 그녀의 말처럼 내 몸을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수행해주는 능력의 종합체로만 인지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제일 먼저 한 일은 ‘몸무게 재지 않기’였다. 호주에 온 뒤 주식이 바뀌어 다소 늘어난 몸무게 때문에 매일 강박적으로 웨이트와 유산소 운동을 하며 몸무게를 달아보는 버릇이 생겼던 참이었다. 사실 미국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할 당시에도 비슷한 숫자 강박을 겪었다.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60kg를 찍게 되었는데, 키가 165cm인 나에게는 정상체중 범위에 있는 수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입생시절까지 금기의 50kg를 넘겨 본적이 없었던 나에게 ‘엄청난 사건’으로 다가왔던 탓이었다. 


흔히 브라운관을 통해 접하는 아이돌이나 셀럽들이 수수깡처럼 마른 몸으로도 ‘요새 살쪘다’며 넋두리를 하는 모습 등을 그대로 내면화 한 결과였다. 귀국 전 세달 간은 말 그대로 교내 체육관에서 '지옥의 다이어트'를 감행했다. 한국에서 온 남자 유학생들이 여행을 떠날 때 나는 같은 시간을 체육관 트레이드 밀 위해서 보낸 셈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는 내 몸에 '체벌'을 내리는 행위로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것은 자기개발도 아니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도 아니라는 것을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체중 감량을 목표로 타이트하게 짜여진 운동 스케줄을 버리고 오직 나의 몸에 맞는 새로운 루틴과 종목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운동 목표도 '50키로까지 몸무게를 줄이기'에서 '하루 종일 활력을 느낄 수 있는 모먼트 만들기’, ‘내 몸이 건강하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운동을 하기’로 바뀌었다.  


식사 패턴도 자연스럽게 변하기 시작했다. 음식의 순간적인 맛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음식물 섭취 후 내 몸과 감정의 변화를 살피기 시작했다. 음식의 '양'을 다량 섭취함으로 얻는 위의 포만감이 아니라, 음식을 먹고 난 후의 기력 및 스태미나 회복 속도에 초점을 맞췄다. 식사를 할 때도 '이 음식을 먹으면 더 살이 쪄서 남들 눈에 덜 매력적으로 보이겠지?'라는 외부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 음식을 먹었을 때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까? 소화가 잘 될까? 더 기운이 날까? 아니면 더부룩할까? 슈거하이(Sugar High) 현상처럼 잠시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가 다시 우울해지는 것은 아닐까?' 

내 몸, 기분이 시시각각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토대로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식습관이 변하자 식욕이 생리주기에 따라 폭발하거나 아예 입맛이 사라지는 등의 불상사는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는 만성으로 시달리던 생리통이 완화되는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각종 이미지들로 점철되어 있는 SNS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몸뿐 아니라 일상에서 스치거나 마주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외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현미경 앞에서 동식물을 해체하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목조목 남을 평가하던 시선과 의식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에너지 소모적인 일이었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무죄 선고│

이 사회가 나에게 원했던, 바랐던 모습이 모습이 아니라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내 모습을 찾기 위해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던 시간들. 내 안의 그녀의 생각을 묻고,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존중해줬던 시간. 나는 어느순간부터 아무 조건 없이도 평상시의 내 평범한 모습 그대로인 채로도 내 인생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완벽하게 사랑스럽고 매혹적인 외관과 캐릭터를 갖추지 않고도 나의 '진짜' 인생 플레이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만의 주관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는 삶은 분명 외롭고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내가 불편함과 억울함에 대해 입을 닫는다면 남들이 보기에 평화로운 연애, 안정된 결혼 생활, 웃음만 가득한 인간관계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침묵은 누군가에겐 평화나 마찬가지이니까. 투쟁과 다툼, 치열한 자기 성찰이 부재한 삶은 오히려 세상의 눈엔 행복하고 안전해 보일테니까. 


우리는 “특별하다”는 표현은 좋아하지만 “유별나다”는 말은 꺼려하기 때문에.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를 잘 맞추는” 사람은 사랑을 받지만, “자기의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내뱉는” 사람은 뭇사람들의 눈총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너한테는 무슨 말을 못 하겠다. 그렇게 예민해서 일상생활 가능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까. 

“네가 문제적이라고 지적한 사건은 <특정한 소수>가 겪는 일이지, <불특정 다수>가 겪는 일은 아니야. 너 역시 그 다수의 범위에 포함되는 사람이니 구태여 소수자들을 대신해 이렇게 분개할 필요는 없잖아?”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리라는 것을 앞서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받는 삶 대신 나의 삶을 택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의존적인 행복 대신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삶을 택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 인생의 그리고 타인의 인생의 배심원도, 피고인도 아니다.


어제까지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던 피고인은, 내일의 KILL JOY, 프로불편러, 갑분싸, 짖는 개, 우는 아이가 되어 누군가의 평화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돌을 던지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던진 돌에서 퍼져 나가는 파문의 원이 겹쳐지고 또 겹쳐져, 누군가들만의 배타적인 잔잔한 호수를 요란스럽게 뒤흔들어 놓을 때까지 말이다.  


이전 09화 외로움의 맨얼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