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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Apr 30. 2019

다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처럼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잠재력의 4분의 3을 상실한다.
-쇼펜하우어 (1788~1860)





 우리는 모두 이별을 한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라는 소설로 유명한 브라질의 작가 J.M.바스콘셀로스의 「햇빛 사냥」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처음으로 친구와의 이별을 겪은 주인공이 '왜 모든 것은 떠나고 마는 거지?'라고 한탄하자, 다른 친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린 제제를 위로한다. '제제, 인생은 떠남의 연속이야.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엄마를 떠나왔던 것처럼.' 작가는 신생아가 엄마의 몸속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행위 즉, 자궁으로부터 하나의 인간으로 온전히 완성되어 박탈되는 현상(출산)을 '최초의 이별'로 본 셈이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떨어져 나옴- 이별-을 겪는다.     


 현대의 우리들이 겪는 우울감의 많은 부분은 상실감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옛 말에 사람 드는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은 이런 텅 빈 공간을 지칭한 것이리라. 누군가 채웠다 다시 비운 자리는 여백으로 남지 못한 채 공백으로 남아버린다. 인간이 외로움에 직면하게 되는 순간은 바로 그 공백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다.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이 되고 나서 배운 가장 큰 깨달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업무적인 것이 아닌 인간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내 안에 나라는 존재감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타인의 질량으로 채워야 하는 마음속 공백이 점점 더 넓어져 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대기업 사원이란 타이틀, 당연하게 수행하온 착한 딸이란 역할, 연애와 데이트라는 관습화 된 활동을 별 다른 감상 없이 행하고 있던 연애 인구로써의 생활, 술자리마다 꼭 부르고 싶을 정도로 쾌활한 친구라는 포지션들에 '일방적 결별 선언'을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비유를 하자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연회장에서 파티 호스트가 별안간 무대 위로 뛰쳐 올라가 마이크를 움켜쥐고 "저기요, 다들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라며 한때 인터넷에 유행하던 짤을 연상시키는 상황을 그대로 인생에서 연출한 것이다.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이 글을 왜 쓰냐는 질문에 '단순한 이기심에 쓴다'라고 했던 것처럼, 나도 오롯이 나를 위해 자체 인간관계 휴강을 때렸다. 도피성 워킹홀리데이가 맞았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 곳에서 나만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나의 취향, 적성, 본능, 욕망, 두려움, 기대..      


 호주에서는 백패커들과 어울리고, 갓 20살이 된 친구들과 어울리고,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나의 조각을 찾아 맞춰가는 시간을 가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바다로 뛰어들고, 커다랗게 웃기도 하고, 때로 울어가며 내 안의 나라는 존재의 질량을 저울질해보던 시간을 가졌다. 나는 가장 낮은 곳에 있었지만 그만큼 자유로웠다. 그만큼 외로웠고, 그만큼 고독했다. 완벽히 낯선 곳에서 나 또한 완벽한 이방인으로 지냈던 나날들은 나에게 뚜렷한 본능적 욕망을 일깨워 주었다. 이 시간들은 내가 먼 길을 돌아 다시 작가의 꿈에 도전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오늘날 다시 펜을 쥐고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다시 돌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진실과 내가 써 내려가는 문장 사이의 낙차 없이 아래의 말을 되뇔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나의 인생은 떠나기 전보단 더 불안해졌지만, 덜 불행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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