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lie May 28. 2019

부족한 사람끼리 모이면 더 부족하지 않나요?

반쪽(0.5)끼리 만나면 1이 아니라 0.25가 된다

  

진심을 다해 사랑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네 모든 것을 던져보라. 세상에 태어나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시도는 나를 더욱 깊고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랑을 하면 성숙해진다"는 예의 그 '대국민 사랑 장려' 캠페인 캐치프레이즈 같은 말을 들었던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위의 대사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미디어를 통해 접한 XX와 XY 염색체의 케미스트리는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자생력을 상실한 영혼의 심리적 구멍을 메울 수 있는 한 없이 무르고 부드러운 진흙 같은 접착체처럼 보였다. 구멍이 송송 뚫린 불완전한 존재의 빈 공간을 틀어막을 수 있는, 인. 간. 접. 착. 제.      


놀라지 마십시오! 이 흐물흐물한 접착제는 존재의 빈 공간을 통해 안팎으로 마치 한 겨울 외풍처럼 들락날락 거리는 삶의 냉기를 무엇보다 확실하게 막아줍니다. 그래서 반쪽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죠! 반(0.5)과 반(0.5)이 만나면(+) 완전체(=1)랍니다. 이토록 경이로운 양의 정수를 당신도 이번 생에 꼭 한 번은 체험해 보세요 =)      

아주 어린 날부터 연애=사랑이라고, 사랑을 하면 외롭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은 아주 쉬웠다. 세간에서 잘 어울리는 여남 한쌍을 놓고 '운명'이니, '영혼의 반쪽'이니 알록달록 보기 좋게 붙여 놓는 꼬리표를 달고 싶다고 욕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외제차 보다, 반레아(반포 래미안 아파트)보다, 사랑은 단연코 더 위대하고 가치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것이 가지고 싶었다. 어찌 일개 인간으로 태어나 그 위대한 감정과 황홀경을 탐내지 않을 수 있으리오. 세간에 출시된 그 어떤 진통제나 환각제보다 확실하게 삶의 고통을 줄여주는 완벽한 조합인 것을.      


어린 날의 나는 똑똑했지만 순진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랑을 한다는' 행위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행위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연애라는 사회적 행위에 동참해보기로 했다. 미디어를 통해 학습한 '로맨틱하다는' 장면을 내 인생 속에서 실현해 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성적 올리기처럼, 누군가와 교제하는 일에 대한 일종의 압박감마저 느꼈노라고 이제야 고백하는 바이다. 이성관계에서 설렘과 섹스 텐션을 느끼지 못하는 인생은 지난하고 권태로운 노잼(so lame), 아니, 풀 한 포기 제대로 틔워낼 수 없는 황무지같이 퍽퍽하고 적적해 보였다. 사랑을 모르는 삶은 불행과 고독과 외로움의 트리니티-삼위일체-이리라.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리 머지않아 순간의 주파수와 자기장이 맞는 사람끼리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던 생각이 보기 좋게 빗겨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몸과 마음으로 부딪치며 특정한 누군가와 깊어진다는 것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또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진심과 시간, 그리고 에너지가 전부라고 믿었던 나는 순진했다.      

상대방을 온전하게 이해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의 무수한 사념들 중에서 입을 통해 언어의 형태로 내뱉어지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을 뿐이었으니까. 함축되거나, 생략되거나, 왜곡된 감정과 진실까지 헤아리며 품을 수는 없었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문화적, 사회적 프레임에 갇힌 성별적 이질성과 배타성은 비단 생식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서로가 가늠할 수 없는 지척에서 출발해서 한 수간 닿은 만큼 다른 존재를 완벽히,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걸어온 그 길을, 시간을, 경험을, 세계를 되짚어 돌아가는 것만큼 오래 걸리는 아마득하며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한 배에서 태어나 같은 환경에서 자라난 피붙이조차 할 수 없는 한 존재에 대한 공감이 어찌 타인으로 이뤄질 수 있으리오.     

                      

                                 

왜 아무도 만난다는 행위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는(x) 행위라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양의 정수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른 온전한 양의 정수라는 것을 말이다. 부족한 사람끼리 만나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남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먼저 홀로 완전해지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왜 아무도 강조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네들이 하는 말처럼 사랑의 경험이 인격적 성숙과 이어지는 일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이미 성숙한 두 명의 온전의 인격체’라는 건 도대체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홀로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은 둘이서도, 셋이서도 완전할 수 없다는 걸 말이야. 불안정한, 불완전한 인간끼리 아무리 아무리 곱해도, 점점 0에 수렴해 갈 뿐이라는 걸.       


작가의 이전글 다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