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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Aug 06. 2019

풍요를 찾지 말고, 스스로가 풍요 그 자체가 되어라

여름 방학 그림일기 숙제처럼 미루던 '니체'에 대한 단상


 똑같은 것을 대해도 어떤 사람은 거기서 많은 것을 깨닫고 얻어내지만, 어떤 사람은 한두 가지밖에 얻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를 능력 차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풍요롭게 해 줄 대상을 찾지 말고, 나 스스로가 풍요로운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능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자 풍요로운 인생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중


 니체를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니체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니체에게 제대로 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전까지 그를  '신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아포리즘을 남긴 명철한 회의주의자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을 읽기 시작하며 니체라는 인물이 다시 -어김없다고 표현해야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활자의 잔잔한 표면 위로 긴 파문을 그리며 떠오르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고, 여름 방학 그림일기 숙제처럼 미루던 '니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마침내 이번 여름에 열게 된 것이다. 푹푹 찌는 여름 동안 그의 족적을 따라 킁킁거리며 책장 사이를 이리저리 사냥개처럼 뛰어다닐 내 모습이 벌써 눈에 선연하다.

 

 나는 무언가에 자신의 존재를 맹목적으로 던지는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뛰어넘은 애틋함을 가진다. 개인의 변태적 취향이라기에 그 행위에는 숭고함이 담겨있다. 희생이라는 개념과는 깊이와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마치 투수의 손에서 벗어난 직구처럼 한 곳을 향해 날아가는 움직임에 망설임이 묻을 겨를이 없다. 무언가 멈춘다는 것은, 주춤한다는 번민과 주저함의 증거다. 헌신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에 뛰어드는 행위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눈먼 봉사처럼 단숨에 뛰어내리는 것이다. 그 대상은 철학적 테제가 될 수도 있고 정치적 사상, 또는 종교적 아포리즘일 수도 있다. 생동감이 없는 것 즉, 관념에의 헌신과 집착은 종종 미쳤다는 표현을 대동하기도 한다.

 저 서문의 구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맞물려 떠올린 다른 구절이 있었다.


나는 인터뷰만이 아니라 영화나 책에서 감동을 받으면 잠이 잘 안 왔다. 가슴에서 퍼내야 홀가분했다. (...) 이걸 감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동이 가슴 안에서 솟구치는 느낌이라면 감응은 가슴 밖으로 뛰쳐나가 다른 것과 만나서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오는 ‘변신’의 과정까지 아우른다. 감동보다 훨씬 역동적인 개념이다. 또한 기억력처럼 감음은 ‘능력’이다. 반복 훈련을 통해 힘이 쑥쑥 길러진다. (...) 감응하면 행동하게 되고 행동하면 관계가 바뀐다. 내 안에 머무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언어를 통한 ‘함께-있음’, 그리고 ‘나눔-변용’이다.

-은유, 「글쓰기 최전선」


 감응 感應 이란 사전적 의미로 '어떤 느낌을 받아 마음이 따라 움직임'이란 뜻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믿거나 비는 정성이 신령에게 통함'이다. 염화미소 拈華微笑라고 표현해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는 평상시에 무언가 인상적인 장면이나 사람을 마주쳤을 때 쉽사리 감동하여 감탄사를 내뱉곤 한다. 그러나 그 행위에는 중력이 작용하지 못한다. 자체적인 질량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감응해야 한다. 이 작용은 외부적 요소를 내 안으로 끌고 들어와 촉매를 통한 화학작용처럼 스파크를 일으키며 새로운 돌연변이를 탄생시킨다. 그때부터 감동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 내부의 것으로 '변용'되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감동의 장면의 3자로서가 아니라 당사자로서 개입되는 순간이다. 이제 더 감동은 외부의 것이 아니다.


 서문의 니체 말 역시 같은 개념을 달리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것이다'라고. 그가 자기 자신부터 풍요로운 사람이 되라고 한 데는 다 이와 같은 맥락이 깔려있다. 내 안에 촉매제를 많이 매장해 놓을수록 새로운 개념이나 환경, 또는 사람을 맞닥뜨렸을 때 파바박 튀는 새로운 감응을 만들어낼 기회가 더 잦아지기 때문이리라. 그리하면 별당 연못에 핀 연꽃 한 송이만 보고도 잔잔한 깨달음의 미소를 입가에 머금을 수 있을지 모른다. 풍요는 이리도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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