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관한 고찰
0.5 + 0.5 = 1이 아니라, 0.5 x 0.5 = 0.25가 아니냐는 발상이었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게 아니라 (멍청이 둘이) 얇은 종이 맞들려고 하다가 백지장 찢어진다! 정도가 되려나?
0.5 + 0.5 = 1이 아니라, 0.5 x 0.5 = 0.25가 아니냐는 발상이었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게 아니라 (멍청이 둘이) 얇은 종이 맞들려고 하다가 백지장 찢어진다! 정도가 되려나?
그 장면을 보는데 문득 며칠 전에 가족들과 용인에 있는 한국 민속촌에 나들이를 짚신을 만드는 공방 앞을 지나칠 때 본 안내판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과거에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한 바람으로 짚신을 한 짝 씩만 보관하기도 했다’는 옛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속담이 여기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 속담 때문에 위와 같은 미신적 관례가 생긴 것인지 몰라도, 샤머니즘의 나라 답게 암암리에 많은 사람들이 옷장 속에 짚신 한 짝을 고이 보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짚신 한 짝으로는 길을 떠날 수가 없는 법. 짝과 짝이 만나야 비로소 신발의 온전한 기능을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너는 나의 반쪽!’타령이 등장한 것이었을까?
멀리서 널 보았을 때
다른 길로 갈까 생각했는데
변한듯한 널 보고 싶고
짧은 인사할까 하는 마음에
두근대는 가슴으로 한 걸음씩 갈 때
네 어깨 손 올리는 다른 어떤 사람
화가 난 네 얼굴은 미소로 바뀌고
두 사람은 내 옆을 지나갔지
둘이 되어버린 날 잊은 것 같은 너의 모습에
하나일 때보다 난 외롭고 허전해
네가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그래서 넌 둘이 될 수 있었던 거야
둘이 되려면 이분의 일(0.5)가 필요한데, 네가 다른 어떤 사람과 눈 맞아 가버리는 바람에 일과 이 분의 일인 채로 남아 버렸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인데, ‘아니, 그럼 떠난 여자는 뭐예요? 그냥 1(정수)도 아니고 0.5(분수)짜리 인간이란 말입니까? 가사 속 남성 화자의 자아가 너무 비대한 거 아닌가요? 진짜 제 분수도 모르는 소리 하고 자빠져 있네 ………’라는 등의 이성적 추론은 잠시 접어 두도록 하자. 요지는 전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그 빈자리만큼 허하다는 시적인 의미이니…. 혹시나 1(온전한 정수, 짚신 한 켤레) vs. 2분의 1(=0.5 반쪽짜리 정수, 짚신 한 짝)이라는 뜻이었다면 바로 앞 문장의 격렬한 비판은 점잖게 사과드리겠다. 아니 근데 제목을 제대로 썼어야지 왜 2분의 3이라고 오해할 수 있을 법한 제목을 선정했나? 게다가 ‘네가 가져간 나의 반쪽(0.5) 때문에 둘(2)이 되었다’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다분하지 않은가? ‘소수점 첫째자리 버림’ 화법도 아니고 뭐야 정말……. 어쨌거나 여기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더하기(+)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가사 속 남성 화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서문에 나온 타국 출신 가수의 발언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는(x) 행위라면?
이 논리 속에서 반쪽짜리 인간들의 만남은 아무리 곱해봐야 점점 0에 수렴해 간다. 게스트의 말처럼, 부족한 사람끼리 만나면 더 부족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필시… 둘이 만나 정수가 될 생각보다, 혼자서도 불완전 소수가 아닌 온전한 양의 정수가 되라는 뜻이다!’
아마 한국민속촌 관계자도 짚신 공방 안내판 앞에서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한 방문객의 후기를 읽으면 어이가 없을 것이다. 마치 할머니 생신에 드릴 카드를 예쁘게 그려보는 수행 평가지에 ‘삼성 카드’를 그려 내는 한 초등학생의 답안 같달까… 어쨌거나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한국민속촌에서 1인 가구의 해답을 찾았다…! 외로울 때 외로운 인간 만나면 더 외로워진다! 그러니 외롭고 적적하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가정을 꾸릴 생각하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