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한 실패에 대하여
이인증이라는 정신병리학적 용어가 있다.
현실감각이 멀어진 기묘한 느낌, 뇌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면 일시적으로 현실감을 차단하는 방어기제란다.
이런 현상이 시작된 건, 내가 회사 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종종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대화를 하는 상황에서 내 목소리가 마치 다른 곳에서 울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분명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데. 나는 특정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한 채 다분히 3인칭 적인 관점으로 현상을, 사건의 흐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동인형 같은 대답과 반응.
내 껍데기가 지난 세월 간 익혀온 관성에 따라 최소한의 사회적 도리라도 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안쓰럽다고 해야 할지.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생을 살아내고 있는데, 그 특유의 생동감과 활기참이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생명이란 약동하는 것, 관자놀에서 뛰는 맥박처럼 팔딱팔딱 뛰는 것이었다. 그래, 물 찬 제비 같은 약동하는 감상 같은 거. 그러나 지금 내 마음은 고인 저수지에 가까웠다. 한 겹, 두 겹... 수초만 덮인 채 흐르지도 못하고 썩어가고 있는.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내가 대기업을 그만둘 때부터? 하지만 그때도 정말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살고 싶어서, 숨이라도 제대로 쉬고 싶어서, 내가 나답게 살고 싶어서 도망치듯 뛰쳐나왔던 게 아니었던가. 사면초가. 막다른 골목에서 내린 선택을 마냥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 있을까?
인생의 매 순간 나를 위한 최선을 골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그게 아니었다. 과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만 중요했다.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인가만.
살기 위해 내린 결정들. 그 끝에 선 나는 아직도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다. 어쩌면 지난 내 선택이 모두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라는 지독한 회의감을 두 어깨에 얹은 채로.
밖은 더 지옥일 거라는 상무님 말이 맞았을까. 더 참았어야 했나.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길 바란 게 잘못이었나. 내 가능성을 믿은 게 지나치게 무모했던 걸까? 아니면 뭐든 끝을 못 내는, 나라는 인간의 존재론적 결함일까?
세상엔 제정신으로 치열하게 사는 사람도 이미 너무 많아서, 애초에 내가 제대로 된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달성 불가능한 명제였던 거지.
우울 기질, ADHD, 그에 따른 여러 마음의 질병.
이런 것들을 방패 삼아 뒤로 숨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비슷한 조건에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경력을 쌓고 성취해 낸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는 어쩌면 그냥, 운이 나빴다고 우물거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요즘의 나는 대부분의 문장을 그 말로 끝맺는다.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갖지 못해서다.
애매한 서술어는 흐릿한 형상을 감춰두기에 얼마나 편리한지.
지난 수년 동안, 나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자기 효능감을 셀 수 없이 깎아 먹어 왔다. 원한 건 그저 나 하나 온전히 설 수 있는 자리였을 뿐인데, 그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고되고 혹독했다.
석공이 돌을 다루듯 나는 나 자신을 깎아내 왔구나. 조금씩 덜어내고, 다듬고, 다시 쳐내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가루들은 마른 땅콩껍질처럼 가볍게 흩어지고. 그리하여 남은 건, 걸어 다니는 껍데기에 가까운 어떤 형체.
껍데기가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다.
돌가루는 돌가루다.
이런 상태로 어디를 간다고, 무엇을 본다고, 얼마나 대단한 감흥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와닿지 않고 스며들지 못하는 데.
사소한 일상의 것들에서 소소한 감사와 즐거움을 느끼려는 시도는 무용할 뿐이다.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생각은 우로보로스처럼 제 꼬리를 물고 쳇바퀴를 돌며 나를 끊임없이 낙담시킬 뿐이다.
모든 게 한정되어 있다.
'모르겠다'는 불확실성과 '~뿐'이라는 한정법만이 내 감상을 가득 메우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