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덕이 되지 못한 오리에게

소비되지 않는 존재의 초상

by Ellie






애매하다.


현재의 내 상황을 가장 잘 대표하는 표현이다.

모든 것이 다 어중간하다.

나이도, 능력치도, 껍데기도, 정신 상태도, 삶의 방향성도.

무엇 하나 빼어나게 잘하지도, 잘 해내지도 못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벌써 한참 전에 무언가라도 되어 있었겠지만, 열심히 산다는 착각과 가능성에 중독된 상태로 살아온 게 전부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처음 취직했던 직장을 계속 다녔을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무가치함보다 이질감에 더 시달리고 있었다. 내가 남들과 조금은 다르다는, 그래서 섞이지 못한다는 자각에.


어쩌면 내가 통칭하는 '남들'도 그저 이 개 같은 시스템을 버티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겐 버틸 수 있는 정신적 지구력이 있었다. 나는 가지지 못한 무감각함까지.


당시 모든 상황적 지표가 가르치는 건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난 혼자 하는 일을 해야 해.

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분야가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그 분야를 파고들어 전문성을 키우자. 남들이 만든 무대 위에서 주뼛거리면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바에야 내가 내 두 손으로 내가 설 수 있는 나만의 무대를 만들어 보자.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회사원이 아니더라도 내 한 몸 먹여 살릴 수는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20대 특유의 낙담과 절망을 패기로 둔갑시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그 근자감을 뒷받침해 줄 만한 기회를 만나게 된다.

내가 국내 회사를 떠나 외국계를 거쳐 호주로 도피성 워킹홀레데이를 갔던 시점이었다.

브런치를 통해 한 출판사의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플랫폼에 남긴 짧은 토막글을 발전시켜 하나의 책으로 엮어 보는 게 어떻냐는.


그때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막연했던 꿈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숱한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남들보다 부족한 점을 채우려 애쓰는 대신, 남들보다 뛰어난 장점에 집중해 그것을 극대화시켜야 한다고. 내가 그나마 남들보다 나은 자질이 있다면 감성적인 측면이었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예민한 감수성과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라면 어디라도 써먹을 데가 있지 않을까. 그래, 내 생각을 책으로 엮고, 그걸 통해 세상과 다시 소통해 보는 거야.


난 비록 백조 무리에서 탈락한 미운 오리 새끼였지만,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세상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만 커졌다. 분리감을 벗어나 더 큰 존재 및 무리와 연결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DNA에 새겨진 본능이니까. 어쩌면 이 수단을 통해서 나는 단절된 세상과의 원초적 유대감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오리 새끼면 어때. 최소한 베이징 덕이라도 되어서 삐까뻔쩍해져 보자.

노릇노릇 먹음직스럽게 잘 구워져 식탁에 오르는 고급 요리라도 되어 보자.

나는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소비되고 싶었다.

이 세상이 나를 알뜰살뜰 발라먹으려 들었으면 좋겠어.

어떤 의미에서든지 나를 욕망하고 나를 보고 허기를 느껴주었으면.


나를 찾아줘.

나를 욕망해 줘.

그리고 게걸스럽게 나를 소비해 줘.

뼈와 뼈 사이에 있는 살 점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모두 발라 먹어줘.


내가 어떤 패러다임에 찌들어 이런 욕구를 느끼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소비사회론이든, 스펙타클 사회든—그런 이론들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현대사회에서 존재한다는 건 타인에게 인지되고 소비되는 것의 다른 이름 아니던가? 그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존재의 증명 방식이잖아. 개인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타인의 욕망과 소비를 통해서만 실재가 증명되는 기호적 주체이기에.


평범한 성공의 가도에서 미끄러진 나는 오히려 빌어먹을 소비사회의 논리, 보이고 욕망되고 소비될 때만 진실로 인간은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를 더욱 뼈에 저리게 내면화했고, 내가 나답게 산다는 그럴싸한 허울 안에서 누구보다 절실하게 소비당하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자유라고, 가능성이라고, 나만의 길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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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리에서 이탈한 오리 새끼가 고급 차이니즈 식당에 베이징 덕이 되어 오르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조차도 허무맹랑한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오리 새끼가 넘치는 세상에서, 왜 하필 나여야 하는가.

다른 오리들 사이에서 나를 골라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답할 말이 없다.

같은 오리 종이라고 해서 모두 베이징 덕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계곡가 근처 식당의 오리 주물럭이 될 수도 있고, 동네 오리집 철판 위에 올라가는 고기 몇 점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애초에 식용 오리로 욕망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 깨달았다.

미운 오리 새끼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미운 오리 새끼가 특별할 수 있었던 건 백조들 사이에서 딱 한 마리만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 오리만 골라 한 곳에 몰아넣고 나면, 나는 무엇으로 특별해질 수 있을까.

반항이나 이탈조차 시장화되고 포화상태가 된 현실. 나는 반항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그저 또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경쟁시장에 진입했을 뿐이었다.


프리랜서 시장, 창작자 시장이라는 레드오션 속으로.

이건 반항이 아니라 도피였고, 단순한 항로 변경이었다.


나는 다시 애매한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애매함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베이징 덕이 될 수 없다면,

오리 주물럭도 될 수 없다면,

심지어 식용으로 욕망되지도 않는다면,

그래도 나는 계속 글을 쓸 것인가.


여전히 누군가의 시선을 갈구하면서.

여전히 소비되기를 바라면서.

애매함을 끌어안는 것과 애매함에 저항하는 것 사이 어딘가에서, 계속 문장을 고르고 또 고르면서. 나의 실패조차 누군가에게 소비되는 재료로 삼으며.


꼭 누군가의 식탁에 올라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아직 노릇하게 구워지지 않은 산 오리가 나에게 묻는다.


그냥 한가롭게 연못가를 거닐면 어때?


누가 봐주지 않아도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지는 나무처럼.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철에 따라 먼 하늘 길을 날아가는 철새처럼.


욕망당하지 않고 그저 물살을 가르고 유유히 나아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이 아니냐고.


삐까번쩍하지 않아도,
노릇노릇하지 않아도,
그저 내가 쓰고 싶은 문장을 쓰고, 애매한 채로 계속 나아가는 건 어떻냐고.


그렇게 계속 불완전하고 애매한 존재인 채로.

깨진 채로.

미끄러진 채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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