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도 반짝일 수 있습니까
'내가 다시 회사라는 곳을 다닐 수 있을까. 조각 경력에다 경력 단절만 n년 째인데.... 아냐, 그래도 전에 다니던 회사들이 네임 벨류가 있는 곳이었잖아. 운 좋으면 비벼볼 수도 있을지 몰라.'
외국계 회사가 모여 있는 서울의 어딘가.
번지르르한 외관을 뽐내며 지하철역 앞에 우뚝 선 건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신은 구두가 발볼을 꽉 조여왔지만, 그런 신체적 불편함은 그나마 견딜만한 축에 속했다.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버텨온 불안정한 나날들에 깎이고 깎인 마음에 비하면.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막막한 심정으로 구인 사이트를 넘기다 눈에 들어온 공고.
마침 n년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외국계 회사에서 했던 일과 똑같은 직무였기에 자연스레 손이 움직였다.
외국계는 경력의 연결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보는 곳이었고, 게다가 오픈된 자리는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었다.
그래도 영어는 좀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원은 공짜.
"안녕하세요?"
미리 안내받은 층에 도착해 인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자 누군가 오피스 안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사회력 만렙 흉내를 내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간단한 스몰토크를 나누며 안내받은 곳은 통창으로 된 미팅룸이었다.
"커피나 물 중에 뭐 드시겠어요?"
나는 물을 택했다.
가뜩이나 긴장한 상태에서 카페인까지 더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더 심장이 뛰었다간 각성이 아니라 불안장애였다.
옆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 담당자와 함께 면접관이 들어왔다.
다른 것보다 면접관의 편해 보이는 스웨트셔츠가 눈길을 끌었다.
'여자 팀장님인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늠을 해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꾸벅 인사부터 했다.
성실하고 빠릿빠릿해 보이는 이미지로 마이너스가 될 건 없으니까.
게다가 혹시나 붙으면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야 할 사이가 아니던가.
"편하게 앉으세요."
면접관이 권했고, 나는 전혀 편하지 않았지만 그런 셈 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는 사이, 면접관과 인사 담당자가 노트북을 켜고 내 이력서를 화면에 띄우는 게 보였다.
첫인사부터 평가는 이미 시작됐을지 몰라도 오피셜 한 인터뷰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왜 다시 회사로 돌아오기로 한 거예요?"
대략적인 신상정보를 확인한 후 가장 먼저 나온 질문이었다.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내가 면접관이었어도 가장 궁금했을 내용이었다.
회사원으로 커리어를 이어가다 허리를 뚝 잘라먹고, 실컷 다른 곳을 헤매다 돌아왔으니까.
"장기적인 안정성을 고려해, 기존 경력의 연장선에서 전문성을 키워가고 싶어 지원했습니다."
미리 예상했던 터라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앞뒤 사족을 다 빼면 결국 안정성 때문에 다시 회사원이 되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팀 매니저라고 소개된 여자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간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 웹소가 망했습니다'라는 둥의 구질구질한 사족을 붙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어진 인터뷰는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나는 열심히 재잘대고, 고개를 끄덕이고, 지난 기억을 마른걸레처럼 쥐어짜서 실무 경험을 최대한 자세하게 서술하려 애썼다.
과거에 내가 담당하던 품목들의 숫자는 이미 머릿속에서 증발된 지 오래였지만, 작가 밥을 먹어본 짬바로 그럴듯한 숫자를 지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삼국지처럼 허무맹랑한 무용담을 지어내는 대신, 적당히 밸런스를 잘 잡아서.
매니저님이 '우리 팀에 들어오게 되면…' 하며 내가 맡게 될 업무를 설명해 주실 때는, 마치 이미 그 일을 할당받은 사람처럼 꼬치꼬치 꼬리 질문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매니저님이 인사 담당자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정도면 됐다는 시그널 같았다.
"오늘 면접은 이 정도면 될 것 같네요."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n년의 공백을 끝낼 신호탄이 될 줄은.
그렇게 총 두 번의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중고 신입이 되었다.
**
몇 년만의 출근.
나는 설레기보다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패배감과 안도감이 섞인 묘한 감정.
왜 아니겠는가.
자진해서 박차고 나왔던 회사에 다시 제 발로 돌아왔는데.
몇 년간 손을 놨던 엑셀과 숫자, 프로세스와 프로그램들은 한없이 낯설기만 한데, 타임 어택 미션도 걸려 있었다.
3개월 수습기간.
그 안에 내가 녹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그대로 모가지였다.
'...Vlookup도 가물가물한데 큰일 났다 진짜.'
앞으로 적응하며 겪게 될 개고생과 마음고생이 훤히 보이는 듯했지만, 내 머리는 금방 결론을 내렸다.
별 다른 방도는 없었다.
막다른 길이었다.
내가 결정한 일에 책임을 져야지.
인생에 그럴싸한 성공은 못 거뒀어도 내가 뿌린 똥 수습은 해야 할 거 아닌가.
어쨌든.
내가 면접 사기를 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 첫 번째는 챗지피티.
살짝 구라를 잘 치는 것 같지만, 당장 믿을 수 있는 건 얘 하나뿐이었다.
엑셀 수식은 얘가 도와준다 치고.
현실적으로 비빌 수 있는 언덕이 하나 필요하긴 한데.
"저… 잘 부탁드립니다."
안타깝게도—
“…….”
내 사수는 중고 신입을 못 미덥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
.
시발.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