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란 실타래를 푸는 일이다

기꺼이 아리아드네가 되는 순간

by Ellie


자기 자신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페르난두 페소아는 『불안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형형색색의 실타래를 풀듯이 나를 풀어내거나, 아이들이 손가락에 실을 걸치고 주고받는 실뜨기놀이를 하듯 나 자신의 형상을 만든다. (...) 손을 뒤집으면 모양이 달라지고 그러면 다시 새로 시작한다."


엉킨 실타래.

갖가지 감상과 생각으로 뒤엉킨 머릿속을 그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비유가 또 있을까.


암막 커튼을 치듯 어둠이 찬찬히 내려앉는 시간.

하얀 화면 위에서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키보드 위에 올린 손을 뗐다가 다시 얹는다.


첫 문장을 쓰고, 지우고.

엔터를 눌렀다가 다시 백스페이스로 돌아가고.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는데.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오히려 쏟아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걸까.

그렇게 한참 행간 사이를 헤매다 보면 톡, 하고 무언가 손가락 끝에 닿는 느낌이 난다.

실타래의 끄트머리가 드러난 순간이다.


한 단어에 꽂히든, 문장의 리듬에 꽂히든 상관없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을 텅 빈 백지 속에 꽂아 넣는 일이다. 딱 한 번만 성공하면 된다. 그다음부터는 양손 아래서 천천히 둥근 실타래를 이리저리 굴려보며 어떻게 풀어 나갈지 고민만 하면 된다. 마치 고양이라도 된 듯이.


부산스레 타자 위를 움직이는 손가락.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내달리는 펜 촉.

둥글게 둥글게 실타래를 굴리는 것은 내 인생의 한 토막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니체가 그랬던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본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어 그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엉킨 것들을 풀어내야 하니까.


이러다 더 엉켜버리면 어쩌지?

손을 대긴 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냥 상처를 헤집은 꼴만 되는 거 아닐까. 생각에 생각이 더해져서 스노볼 효과처럼 실타래가 더 커지기만 하다면.


그래도 그 끝을 놓치면 안 된다.

그걸 잡은 순간부터 아리아드네가 되는 거니까.

미로 속을 얼마나 헤매든 상관없다.

손바닥이 까지고 발끝이 좀 긁혀도 뭐, 어때.


글을 쓴다는 건 그런 거다.

끝을 잡고 벽을 더듬거리며 앞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가는 것. 미궁의 심연으로 들어가 보는 것. 가서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괴물의 존재를 기꺼이 마주하려고 하는 것. 실타래 안에 꽁꽁 감춰진 내 비루하고 비겁한 믿음들을 밖으로 풀어내는 것.


어둠이 두려운 건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꽁꽁 감춰진 실타래 속.

어딘지 모를 미궁.


자기 자신에 대해 쓴다는 것. 그것은 기꺼이 고양이가 되겠다는 것, 아리아드네가 되겠다는 것.


어쩌면 그 안에 정말 끔찍한 게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기꺼이 자신을 풀어 나가야 한다.


왜냐고?


우린 그걸로 아주 멋진 실뜨기놀이를 할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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