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 선택에 책임을 져야죠. 그게 어른의 삶이니까요.
“본인 선택에 책임을 져야죠. 그게 어른의 삶이니까요.”
상담 센터에서 선생님과 면담 중에 들었던 말이다. 상담은 벌써 5회기 차. 다섯 시간 만에 한 사람의 인생을 전부 고백한다는 건 무리가 있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개요를 훑기에 모자란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상담의 주제는 ‘현재의 나’와 왜곡된 인식,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는데, 어쩐지 결론이 이런 식으로 나버렸다.
선택. 책임. 어른의 삶.
묵직한 표현들이었다. 그 안에는 이유야 어찌 되었건 지금 내게 벌어진 현상에 대해서는 내가 오롯이 감당을 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섞여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내 내면의 아이가 충분히 성숙했건 아니건 그 여부와 상관없이 내 껍데기는 나이를 먹어 버렸고 ‘이젠 어떻게 하냐’며 아이처럼 징징대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 어린아이처럼 불퉁한 생각이 올라온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게 정말 온전한 나만의 책임이라고? 내 인생이 금이나 은 같은 광물은 아니지만, 순도를 따지고 싶은 것이다. 내 선택과 능력이 100퍼센트 나에게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그 안에는 부모의 경제력, 어린 시절의 교육 환경, 우연히 주어진—혹은 주어지지 않은—기회들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한 사람이 이 사회에서 평범하게, 그저 번듯하지 않아도 1인분의 몫을 하기 위해 개인의 의지 말고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할까. 기본적인 자원—자본, 네트워크, 운, 타이밍. 생각보다 많은 구조물들이 받쳐주고 있어야 한다. 다만 그런 것들이 ‘능력 있는 모든 자에게 기회는 평등할지니’라는 사회적 테제 아래 눈 가리고 아웅 하듯 감춰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 역시 그런 사고방식 아래 자라난 세대 중 하나였다. 이런 것들보다 중요한 것이 개인의 의지와 능력이라고 믿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부동산, 주식 등 자산 증식의 사다리에서 밀려난 아랫 꼭짓점을 벗어나기 위해선 ‘갓생’을 외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그 결괏값으로 모든 자본이 만들어 놓은 구조를 타고 올라가는 법밖에는 계급 사다리를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주어진 자본이 넉넉지 않은 사람도 본인의 실력 하나만 들고 싸워 사다리를 넘어갈 수 있는 사회. 이 얼마나 이상적인가. 주식과 부동산 등 돈이 돈을 버는 시대에서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자산 상승률을 한 방에 따라잡을 수 있다는 믿음은 얼마나 달콤했던가. 웹소설로 대박 난 작가, 성공한 브랜드 같은 ‘K의 윗 꼭짓점’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에 미래를 걸어 본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K.
어떤 미스터리 소설에서나 정체불명의 주인공을 지칭할 때 나올 법한 이니셜 대문자. 이 뒤에 성장이라는 표현이 붙으면 장르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서스펜스이자 스릴러가 된다.
K자형 성장, 자산·소득·소비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상을 알파벳 형태에 빗댄 이 표현은, 좋은 쪽은 더 좋아지고 나쁜 쪽은 더 나빠져 성장 그래프가 알파벳 ‘K’ 모양으로 양 극단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2011년에는 소득 격차가 불평등의 주요 원인이었지만, 2023년에는 자산 격차가 소득을 앞섰다. 청년 가구의 경우 2019년에는 상위 20%와 하위 40%의 자산 격차가 4배였지만, 2024년에는 5배로 벌어졌다.
그럴듯한 자본을 소유하지 않은 청년이 평균 근로소득만으로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려면 몇 년을 근무해야 할까? 지난 10년간 서울 아파트 가격은 2.5배 뛰었지만, 근로자 월평균 임금은 39%밖에 오르지 않았다.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전액 저축한다 해도 최소 25년이 걸린다. 강남권은 46년이다. 그 사이에 물가는 더 오르지 않을까? 2025년 기준 서울 아파트를 실제로 매수한 가구의 연평균 소득은 8,874만 원이었다. 2021년만 해도 5천만 원대였던 것이 불과 4년 만에 9천만 원에 육박한 것이다. 이제 서울에서 집을 산다는 것은 고소득층만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많은 것이 나아졌다. 인터넷 덕분에 정보 접근성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유튜브에서는 명문대 강의를 무료로 들을 수 있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창작물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 예전에는 출판사를 통해야만 책을 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웹소설 플랫폼에서 바로 독자를 만날 수 있다. SNS로 개인 브랜딩을 하고, 크라우드펀딩으로 자본 없이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회에의 접근’이 평등해졌다고 해서, 그 기회를 붙잡고 성공으로 전환시킬 능력까지 평등해진 것은 아니다. 같은 유튜브 강의를 들어도, 어떤 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집중력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기초 지식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조용히 공부할 환경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학습 능력, 끈기, 자기조절력—이런 것들조차 타고난 기질과 환경의 산물이라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심리학자 월터 미셸의 유명한 ‘마시멜로 실험’을 떠올려보자. 만족 지연 능력이 높은 아이들이 나중에 더 성공한다는 그 실험 말이다. 그런데 후속 연구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밝혀냈다. 만족 지연 능력은 개인의 의지력보다는 자란 환경의 안정성과 더 깊은 관련이 있었다. 부모가 약속을 지키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기다리면 보상이 온다’는 믿음을 학습한다. 반대로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지금 당장 먹지 않으면 나중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존 전략을 체득한다. 우리가 ‘끈기’나 ‘자기 조절력’이라 부르는 것들, 그것은 순수한 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학습된 신뢰의 결과물이다.
신경과학 연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어린 시절의 만성적 스트레스는 전두엽 발달에 영향을 미쳐 충동 조절과 장기 계획 능력을 저하시킨다. 즉, ‘노력하는 능력’ 자체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이렇게 말했다. “능력주의는 전혀 공정하지 않으며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주는 가혹한 현실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 그는 재능조차도 행운의 결과이며, 재능을 보상받는 사회에 산다는 것 역시 우연이라고 말한다. 노력도 마찬가지다. 올림픽 선수처럼 긴 시간을 연습에만 쏟아붓는다고 해서 모두가 올림픽에 출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연아를 보자. 그의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재능이 꽃필 수 있었던 건 어머니가 빚을 지면서까지 훈련비를 대주었기 때문이다. 새벽 빙상장까지 데려다주는 부모, 고가의 레슨비, 해외 전지훈련—이 모든 것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성공이다. 재능도 있고, 노력도 했고, 거기에 전폭적인 지원까지 들어가서 잘된 케이스다. 만약 같은 재능을 가진 아이가 한부모 가정에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면? 그 재능은 발견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자본’의 문제로 설명했다. 경제적 자본은 물론이고, 교육과 취향 같은 문화적 자본, 인맥이라는 사회적 자본, 그리고 명예와 명성 같은 상징적 자본까지. 이런 것들은 대대로 세습되며 계급을 재생산한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개인의 노력을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은 네 선택이고 네 책임이다’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을 순전히 노력의 결과로 여기며 오만해지고,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온전히 자기 탓으로 여기며 굴욕감에 시달린다. 이 구조 속에서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조에 대한 인식이다. 내가 가진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관심 갖는 것, 심지어 노력하는 능력조차—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자본들의 영향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자기 연민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연대와 공감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상담 선생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어른이 된 이상, 주어진 현실에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 대응이 나만의 책임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의 분투와 동시에 구조의 변화를 요구할 수 있는 목소리. 그것이 진정한 어른의 책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