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은 철저한 개성의 실패라고 잘만 지껄이더니
입사 첫날. 계정 인증을 기다리며 가만 앉아 있던 나는 진한 현타에 잠겨 있었다.
그래도 지난날 꽤 분주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결국 또 제자리구나.
도망쳤던 그곳으로 또다시.
'이럴 거면 그냥 처음 들어갔던 회사나 쭉 다니지 그랬나.'
누가 내 인생 궤적을 본다면 분명 이렇게 말할 게 뻔했다. 마침 나도 지금 딱 그 생각 중이니까.
내가 전에 브런치에 뭐라고 썼더라?
회사원이란 개성의 철저한 실패라고 했던가?
'... 집에 가면 당장 그 글부터 내려야겠군.'
그렇게 얼마간 뻘쭘하게 앉아 있자니, 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입꼬리에 걸며 웃어 보이고.
'벌써 쉽지 않다.'
솔직히 인생 체감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웹소설 공부한답시고 여러 클래식한 판타지를 깨나 읽어봤지만,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바닥으로 처박고 시작하는 소설 같은 상황을 내가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날을 돌아보라.
그동안 얼마나 화려한 실패 전적을 쌓아왔던가.
망한 사업 1건.
퇴사 3건.
망한 웹소설 5편.
엎어진 프로젝트 3건.
흐지부지된 관계 셀 수 없음.
나는 그저 자유롭고 생기 넘치는 인생을 바랐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내가 원한 건, 그래,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그런 삶이었다.
울프가 뭐라고 했더라.
아무리 하찮고 방대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온갖 종류의 책을 써보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을 하고 빈둥거리기도 하고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사색하고 책을 보고 몽상에 잠기며 길모퉁이를 어슬렁거리고 상념의 낚싯줄을 깊이 드리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길 바란다고 하지 않았나.
'전후 관계를 잘 못 인식하고 있었나....'
어쩌면 내가 그녀의 말을 곡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말한 건, '충분한 돈을 스스로 소유하게 되고' 나서, 그 앞에 나열된 지적인 사유와 낭만적인 것들을 누려보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했더라?
'저렇게 꼴리는 데로 하고 싶은 거 하며 살면 충분한 돈이 저절로 생길 거라고 생각했었지.'
전후관계를 완전 뒤집어서 나 편한 대로 해석해 버린 거다.
세상이 나라는 사람의 특별함을 알아봐 줄 거라고 믿었다. 순진하게도. 뭐 세기의 불세출의 천재 이런 것도 아닌 주제에. 회사 바깥이 이렇게 뾰족한 압정 시장일 줄 몰랐던 것도 있지. 불쌍하게도.
메타 인지가 무너졌던 건지, 운이 안 따라줬던 건지, 아니면 그 둘 다였는지.
아니면 그냥 회사가 다니기 싫었을지도 몰랐고, 각종 SNS를 비롯한 무수한 매스컴에서 떠들어대는, '자신이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셀프 브랜딩의 시대!'라는 말에 제대로 선동당한 거였을지도 몰랐다.
'사실 자의식만 비대했던 것뿐인데도.'
재능, 끈기, 운.
셋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있었어야지.
속으로 쓴웃음을 짓는 사이.
IT팀 쪽에서 계정 승인 절차가 끝났는지 사내 인트라넷에 접속이 되었다.
나는 인사팀에서 받은 Newcomers Booklet을 켜며, 책상 옆에 올려져 있던 다이어리를 꺼냈다.
회사 로고가 각인된 사내 다이어리였다.
팔랑팔랑, 몇 장을 넘기자 빈 페이지가 나왔다.
첫 장.
새로운 시작.
나는 펜을 꺼내 들고 새로 배정받은 죄수번호... 아니, 사번과 패스워드를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적었다.
이제 외워야 할 것들이 계속 늘어나겠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건 회사 메일함에 꽂힌 On boarding 사항을 쭉 훑어본 뒤였다.
저 멀리. 몇 데스크 건너 건너.
흘끔, 내 버디로 지정된 분을 건너다보았다.
'.... 역시 쉽지 않다.'
AI 시대에 이런 걸 운운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아무튼 관상 자체가 쉽지 않았다.
뭐랄까, 절대 살가운 타입은 아니고, 빠릿빠릿하게 일 잘하는 사람만 인간 취급 해줄 상.
문제는 지금 내 수준이 말하는 감자라는 데 있었다.
눈앞에는 쩔쩔매며 멍청한 질문을 해 대는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
자존감 박살.
진창에 처 박히는 자기 효능감…..
아아, 예정된 파국이여.
하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는다.
그러나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무슨 회사가 심리상담센터도 아니고.
자아를 찾으러 오는 곳이 아니라 시키는 일 하면서 돈 벌러 오는 곳이 아니던가.
'일단 살아남기만 하자. 살아 남기만.'
살아남기.
내 인생의 목표는 꽤 현실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때 '탈 시시포스'를 꿈꾸던 인간과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시시포스가 누구던가.
제 몸집보다 거대한 큰 돌을 굴려 산꼭대기까지 묵묵히 밀어 올리고, 그 돌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터덜터덜 비탈을 따라 내려가 다시 돌 위에 손을 얹는 삶을 인내하는 자가 아니던가. 그 짓을 모면하고자 회사를 떠났건만.
'그런데 다시 회사….'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게임으로 치면 완벽 배드 엔딩이었다.
아니, 배드 엔딩이라는 표현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뭐 하나 제대로 해 놓은 거라도 있어야, 결말이라도 났어야 엔딩이지.
이건 그냥 튜토리얼 단계에서 튕긴 거랑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
배수진이다.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그래도 한 발 남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
어쨌든 회사에 다시 돌아옴으로써 정기적인 수입이 생긴 거고, 다시 새로운 도전을 준비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마련된 셈이니까.
울프의 말처럼, 일단 자유로운 방랑을 위해 안정적인 금전적 기반부터 마련하는 거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편하게 첫 한 달은 적응한다고 생각하세요."
"아, 예."
전혀 편하지 않음에도 완벽히 이했다는 고개를 끄덕이기.
그리고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손으로 시작 버튼을 다시 꾹 누르기.
다시 시작됐다.
운빨 좆망겜의 튜토리얼이.
물론 두렵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
이딴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버그를 찾아내든,
내가 버그가 되든,
핵을 찾아 내든,
아니면 뭐라도 수를 쓰든.
이 빌어먹을 놈의 튜토리얼이라도 깨야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언젠가 실패하는 것에 실패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일념을 가지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플레이 시작.
내 눈앞에 산등성이처럼 거대한 돌이 나타난다.
이게 앞으로 내가 굴려야 할 삶의 무게요, 책임이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놈의 빌어먹을 놈들을 굴려 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