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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린 Mar 16. 2019

허랜드; 여성과 유토피아

소설 '허랜드'에 대한 비평

 소설 ‘허랜드’는 여성 유토피아 소설의 시초로 여겨지며, 페미니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작가가 활동하던 시기는 1890-1930년대이며, 작가인 동시에 여성인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길먼은 데뷔작인 ‘누런 벽지’부터 꾸준히 여성인권, 여성이 처한 문제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고발하는 류의 작품을 주로 썼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누런 벽지’는 최초의 페미니즘 선언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저작 ‘여성의 권리 옹호’가 발간된 지 정확히 100년 뒤인 1892년에 발표되었다.

 길먼의 주요 작품들은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다. 자신의 경험을 담아낸 누런 벽지와 허랜드 모두 당시 보수적인 미국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드러내기 위해선 은유적이고 중의적인 요소를 사용하거나 또는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하여 허구의 이야기처럼 꾸며내야만 했다. 동시대에 활동한 케이트 쇼팽은 중의적이고 극적인 요소를 통해 여성에게 내제된 억압과 욕망을 드러내는 소극적 방식을 사용하였고, 길먼의 경우 판타지적 요소를 활용하여 적극적이고 강렬한 비판을 담아낸다.                                                                                                          

 본 서평에서 다루고자 하는 ‘허랜드’는 유럽-미주의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세 남성을 주요 인물로 등장시켜 현실세계를 반대로 뒤집은, 소위 ‘미러링 이펙트’로 유럽-미주이 가진 한계성, 여성억압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여성보다는 남성독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모계사회가 가지는 평등성과 대비되는 부계사회의 부조리함을 직시하고 깨닫는 구조로 되어있다.

 길먼이 활동하던 미국은 남부와 북부로 나뉘는 정치적, 사상적 구조로 인해 대립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정치적 성향을 작품 내에서 남성캐릭터로 상징화하였는데, 제프, 테리, 그리고 화자인 밴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유럽-미주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성을 바라보고 이들을 받아들이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제프는 숭배적 여성혐오를 보이는 인물로서, 여성에게 친화적이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허랜드에 적응하며 마지막까지도 그 세계에 남게 되는 인물이다. 나는 이 인물이 유럽, 특히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진다. 제프는 1700~1800년경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을 그대로 인간화한 듯 로맨틱하고 여성찬미적인 자세를 보인다. 그러나 작품 내내 화자인 밴이 지적하듯 여전히 여성차별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허랜드를 마음에 들어하고, 그들 세계에 동화되려 노력하지만 지속적으로 주민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불만을 토해낸다. 또한 제프의 행동은 정말로 여성을 사랑해서, 여성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찬양하기보다는 과학적, 연구결과에 따른 모계사회의 우월함을 찬미하며 여성을 찬양하고 떠받드는 로맨틱한 자신의 모습에 취해있는 쪽에 가깝다.

 테리는 전형적인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남성이며, 마지막까지도 허랜드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쫓겨나는 인물이다. 제프와 대비되는 인물이며, 작품 내내 둘은 말싸움과 의견대립을 보인다. 테리는 여성은 소유물이며, 자신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제프는 물론 화자인 밴에게서조차 공감받지 못하는 상황을 자주 빚어낸다. 나는 테리가 미국 남부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여겨진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모험의식과 식민지배욕구가 충만한 그는 남부가 가지는 여성혐오적 가부장제와 전통주의를 드러낸다.

 화자인 밴은 사회학자로, 화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처럼 적절히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면서도 충실하게 허랜드의 풍경과 인물들의 모습을 묘사한다. 밴은 중립적인 성향을 유지하면서도, 자신과 미국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하고 극복하려는 한편, 여전히 허랜드에 적응하지 못하고 미국의 관습에 얽매어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그는 테리가 쫓겨날 때, 자신의 연인과 함께 그를 따라 허랜드를 떠나게 된다. 밴은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고, 허랜드를 받아들이지만 때론 미국정서를 고집하는 성정을 보인다. 나는 밴이 미국 북부를 상징하는 인물로, 산업과 인권 영역에서 적절히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관습과 융화하고자 노력하는 북부의 성향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이 세 인물들의 특징은 모두 가부장제를 상징하고, 그것이 가지는 한계를 드러낸다. 제프는 순응, 융합, 진보를 상징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가진 성질을 억압하고 숨기도 한다. 허랜드에 남은 제프가 온전히 그곳을 받아들이게 될지, 테리처럼 결국 쫓겨나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독자들은 어떤 시선으로 이 작품을 보느냐에 따라 그가 위험요소가 될지, 아니면 배신자가 될 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테리는 허랜드에 적응할 수 없어 쫓겨날 수 밖에 없는 미래가 예정돼있는데, 이는 허랜드에 대한 그의 편견과 대사들에서 드러난다. 처음 허랜드에 대한 강한 흥미와 욕망을 보인 게 바로 그인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테리는 그곳이 문명적이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과 함께, 여자들의 나라에서 왕이 되는 것이라는 대사를 여러 번 읊는다. 허나 그가 직접 목격한 허랜드는 고도로 문명화되어 있으며, 그들이 살던 미국보다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자신이 여성에 대해 가지던 고정관념을 버릴 수 없던 테리는 그 사실을 부정하며 여자들은 협동할 수 없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다라는 대사를 뱉는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고 나서도 그를 지배하고자 시도한다. 결국 그는 제프와 밴과는 달리 사랑의 개념자체가 지배와 피지배, 성적 이끌림에 한정되어있음을 보여준다.

 밴은 자발적으로 허랜드를 떠나게 되지만 자신의 연인 ‘엘라도어’와 함께 한다. 그는 허랜드를 제프가 가지는 숭배적 입장이나, 테리가 가지는 지배적 입장이 아닌, 참고하고 연구해야 할 배움의 장소로 표현한다. 마찬가지로 밴의 연인인 엘라도어 역시 미국이라는 공간에 대해 흥미와 호기심으로 가득하며, 탐구하고 도전하려는 열의로 가득하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며, 그 동안 밴이 겪어온 가부장식 연애, 여성을 소유하고 가정을 이루는 형태의 사랑이 아닌,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서로에게서 배워나가는 평등한 관계를 이루어나간다. 하지만 그 역시 허랜드를 떠나기 직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미국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엘라도어와 잠깐이나마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인다. 엘라도어가 나고 자란 허랜드는 거대한 공동체이며 각 개인의 성질, 성향, 주체를 중요시하기에 가족과 가문에 의미를 두지 않고 서로를 보호하고 보육하는 집단체제이지만 밴이 자란 미국은 여전히 여성은 남성의 가문에 종속되어야 하고, 아이와 가정을 돌보는 것이 역할인 구조를 유지한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우고자 하는 겸허함으로 이를 극복해내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밴과 엘라도어는 서로 다른 국가출신이지만, 둘 모두 변화를 수용해야 하는 현실을 상징한다. 또한 배움과 탐구를 중시하는 인물로서, 어쩌면 자신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상황조차도 감수하고 뛰어드는 성향을 보여준다. 밴은 허랜드를 통해 배운 지식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한계와 차별의식을 인식하게 되고, 이를 미국 사회에 전파함으로써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 특히 인권과 사회계급에 대한 영역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엘라도어 또한 미국에서 가부장제와 사회를 배우고, 이를 다시 허랜드에 전파하거나 또는 미국에 허랜드의 모계사회와 평등의식을 퍼뜨릴 것이다.

 소설은 오픈엔딩이며, 이들이 허랜드를 떠날 준비를 하는 장면으로 끝마친다. 밴과 엘라도어가 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되는 미래는 작가가 주장하는 바이다. 여성들의 경우, 기존의 페미니즘 문학과 동일하게 소설의 내용을 현실화하고자 노력하거나, 그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이 그릇된 것임을 깨닫고 저항하려 할 것이고, 남성의 경우 자신이 이 세 명의 남성들 중 어느 쪽의 성향에 가까운가에 따라 갈릴 것이다. 만약 테리처럼 자신이 가진 것들을 계속 유지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면 이러한 허랜드가 단지 허구의 것이며, 여성들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에 불과하다 여길 것이고, 밴처럼 문제의식을 깨닫는 이라면 페미니스트를 상징하는 허랜드 또는 엘라도어와 함께 미국사회, 더 나아가 가부장제 사회를 개혁하고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작품 내 등장하는 허랜드는 여성이 가지는 특징을 극대화한 공간이다. 모성애와 타협, 전체를 위한 희생정신을 강조하는데,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아이가 존재한다. 아이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허랜드 여성이 해야 할 미덕이며 마땅한 의무로 여기고, 아이를 가지고 양육하는 것이 축복이며 신의 뜻이라 받아들인다. 아이를 낳는 행위 자체가 선택 받고 행복한 행위이지만 개인적인 문제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을 불운, 처벌이라고 여겨지는 모습 또한 존재한다. 나는 이 점이 공감되지 않았는데, 모성애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점이 그러했다.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여성이 있을 수 있고, 임신과정에서 일어나는 신체 변화나 고통에 대해 전혀 언급 없이 단순히 임신과 출산이 축복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경쟁도, 위험요소도 없는 상황에서 자연적으로 여성이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생물학적 행위가 출산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타당할 지도 모른다.

 이것이 불편한 이유에 대해 좀 더 언급하자면, 엘라도어가 허랜드를 떠나게 된 이유가 사랑도 있지만, 제프의 연인인 셀리스가 임신을 하게 된 과정에 흥미를 느낀 것 또한 영향을 준다고 본다. 본디 허랜드는 여성만 남은 상태에서 진화 또는 돌연변이에 가까운 기적을 통해 스스로 임신하지만, 셀리스는 제프와의 성관계를 통해 생물학적 수정을 한다. 이는 허랜드에 자가생식이 생기기 이전의 일로, 호기심이 많은 엘라도어에게 흥미로운 일로 여겨진 듯 하다. 그렇기에 아직 임신하지 않은 상태인 자신이 외지에 대한 탐구와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잉태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밴을 따라가야만 했고, 그 결과 엘라도어, 밴, 테리 세 명이 허랜드에서 나가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지만, 한편으론 엘라도어의 행보가 밝기만 할까에 대한 의문이 든다. 결국 밴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고, 엘라도어의 입장에서 허랜드를 나가는 행위는 도전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희생이 될 수도 있다. 밴이 테리처럼 여성을 억압하고 구조를 유지하는 데에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결국 그들이 가는 곳은 가부장제가 완고한 1900년대의 미국이고, 밴과 엘라도어가 노력하더라도 두 사람이 구조를 이겨내고 저항하기란 쉽지 않다. 작가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밴의 행동을 중립적이고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정착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사회와 인간은 양면적이고 자신이 자신 문제를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음을 밴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1915년에 발표된 이 책이 아직까지도 읽히며, ‘이갈리아의 딸들’과 같은 페미니즘 유토피아 소설이 계속해 쓰여지는 것은 여성문제가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작가가 책을 쓴 그 시간에 머물러있음을 나타낸다. 밴처럼 독자는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기 어렵고 계속해 반복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전통적인 페미니즘 플롯의 문제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설 플롯이 문제를 드러내고 주인공은 자살 또는 탈출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에서 벗어나거나 소멸되는 흐름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허랜드 또한 모계사회에서 탈출하는 두 남성,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가 가진 문제를 드러내고 비판하지만 결국 미국사회와 가부장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의 행동이 왜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정도만을 인지하도록 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이것이 작가의 한계인지, 아니면 여성작가가 자유로이 출판할 수 없도록 억압한 사회의 한계인지는 독자 스스로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나는 이 점에서 사회의 한계에 좀 더 힘을 실어주고 싶다. 직설적이고 적극적인 문체가 특징인 길먼이지만, 결국 그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제 겨우 여성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글을 출판할 수 있게 된 때이며, 유럽과 북부보다 더욱 완고한 미국 남부였다. 여성들만 존재하며 자가생식이 가능한 세계관인 만큼, 더 직설적이고 강한 표현을 썼다면 출판이 좌절되거나 아직까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작가가 본 최대한의 타협이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로 여겨진다.

 현대의 관점에서 이 글을 재해석하고 다시 써내려 간다면 좀 더 대담하고 비판적인 내용을 담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여성유토피아를 담고 있는 책들이 출판되기를 바라며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을 담는다.


#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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