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라는 위치에 불만을 가질수록 내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죄책감의 모습을 한 무엇인가가 나를 꾸짖었다. 오래 생각해보니 그건, 나의 어머니였다.
주부로 살면서 평생 집안일에 지친 엄마들은 보통 딸에게 “넌 나처럼 살지 마라 나가서 일해라” 한다던데
나의 어머니는 달랐다.
일하고 싶다는 나에게 어머니는 늘 말했다.
“에휴.. 그거 다 헛되지 뭘 한다고.. 그냥 집에서 살림 예쁘게 하고 정원 가꾸고 애들 야무지게 키우면서 살면 얼마나 좋으니… 토끼 같은 애들이 둘이나 있는데..”
때로는 못 들은 척하고 때로는 대차게 대꾸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러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내 살림 내 애들한테 다 쏟아붓지 못하고 방황을 할까?'생각하곤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어머니뿐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사업을 하셨던 시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니가 제일 부럽다, 나는 너처럼 살림만 하면서 살고 싶었다’고 하실 때마다 나는 몹시 불편하면서도 '그러게 대단한 무엇이 되지 못할 바에야 집에 있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 싶었다.
일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을 종합해 보자면 이랬다.
-여자가 일하러 나가는 건 결국 돈 때문이다. (전업주부는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증거다)
-여자가 밖에서 일하느라 남편을 잘 못 돌보면 남자는 바람이 난다.(막장 드라마를 너무 보신 건 아닌지..)
-아이들은 엄마가 키워야 잘 자란다.
-여자가 바깥일 해봐야 늙으면 다 부질없다.
“근데 지금은 엄마, 집에서 살림하고 애 키우는 여자들을 조롱하기도 해.
맘충이라고 벌레나 잉여인간으로 취급하기도 해.”
그러자 어머니는 “뭐??? 설마! 일부겠지. 부러워서 하는 말일 거다”,라고 일축했다. 어머니는 처녀 때 은행에 다니셨는데, 80년대 은행 창구 여직원이 하는 일을 생각해보면 과연 직장에 다니는 게 여성에게 유쾌하고 성취감 있는 경험은 아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러니 커피 타는 꽃이 되는 성취보단, 내 살림 내 식구 보살피는 일이 훨씬 큰 성취였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딸들처럼 나도 ‘엄마처럼 사는 게’ 제일 싫었다. 어머니는 늘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고 음식의 가장 맛없는 부분을 먹는 사람이었으니까. 있었을지도 모를 재능과 에너지를 집에서 단순 반복 노동으로 소진하며 늙어간다니... 인생 한 번인데 너무 허무하잖아. 어떻게 그 작은 울타리 안의 삶에만 만족할 수가 있지?
만약 어머니가 주부로서 자기 연민에 빠져(… 나처럼) 괴로워했다면 그것 또한 딸로서 견디기 힘들었겠지만, 작은 것만 누리면서 만족하는 어머니를 보는 것 또한 분했다. 마치 내 미래인 것처럼 초조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일시의 찌꺼기가 남아있는 걸까? 타인인 내가 어머니의 삶을 판단하고 평가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런 삶에 알레르기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의 내 모습을 못 견디겠는 건지도 모른다. 어머니보단 나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스스로를 꾸짖는 것이다.
어머니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아는 한 어머니는 자신이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힘들다는 이유로 가족이 저녁밥을 거르게 하거나, 입을 옷이 없도록 만든다거나, 하여간 우리를 불편하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본 '전업주부'란 엄청난 책임감과 인내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욕구를 한없이 지연시켜야 하는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과연 내가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되어야 할까? 를 생각하면 외면하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내 유년의 낙원 같은 느낌, 손 내밀면 닿던 편안한 삶이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깔고 누운 부드러운 매트리스란 것을 알게 될수록 서글펐다. 자식들의 매트리스가 되는 것은 행복한 일이면서도 가슴이 아픈 일이다.
전업주부라는 일에 대해 내 안에는 온통 모순되고 복잡한 이중적인 마음들이 가득하다.
나에게는 심지어 이런 두려움도 있다. 혹시라도 내가 전업주부를 벗어나 직업인으로 성공한다면, 전업주부만이 행복하다고 믿어온 엄마의 삶을 모욕하거나 배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나의 행복 추구가 엄마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지? 하는 이상한 마음이다. 혹시 이건 '계속 무능하고 순진하게 굴면 최소한 어머니한테는 계속 귀여움 받을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은 아닐까?…..이런 것들을 남편에게 말하니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본다. 미안한데 정말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하긴 그렇게 말하는 나도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 연민의 선을 넘는 불건전한 무언가가 아닌가. 나는 책에서 공감을 얻었는데, 킴 처닌은 <허기진 자아>에서 여자는 딸로서 자신의 인생이 반드시 자기 어머니의 인생을 반영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지적했다. 처닌은 이렇게 썼다. “성년이 되고 세상으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딸은 어머니의 부러움과 질시를 불러일으킬 위험에 처하는데, 그보다 더 나쁘고 고통스럽고 생각하기도 심란한 점은 이제 딸이 자기 어머니에게 어머니 자신의 실패와 결핍을 상기시키는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거의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나는 이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에서 먼저 졸업하고 싶다.
나는 어머니가 지나온 세상보다는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실패와 어머니의 포기, 어머니의 희생 같은 것에 민감한 건 무슨 이유인지 궁금했다. 왜 끝나지 않은, 나에게도 영향이 있는 이야기라고 느끼는 것일까?
이에 대한 부분적인 답으로서, 전세대의 여성들-어머니와 시어머니-과 내가 시대를 초월해 공감하는 전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여자로서 일을 한다는 건 성인으로서의 자연스러운 행위라기보단 성별로 이미 의무가 된 역할을 쪼개거나, 미뤄두거나, 거부하면서 얻어내는 힘겨운 과업인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결혼으로 인해 달라지는 삶. 출산과 육아, 경력 단절과 다시 일하기 또는 전업주부로 살기, 그 사이에 모든 형태의 여성으로서의 삶은 제각각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예측하기 힘들어 보였다. 나와 주변의 여성들, 또 여기 브런치의 글들을 보면서도 느낀 점이다. 전업주부라서, 전업주부가 아니라서, 워킹맘이라서, 워킹맘이 아니라서. 모든 게 죄책감의 재료가 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죄책감의 소재들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전업주부라는 표식 안에 든 이중적이고 혼탁한 의미들을 모두 꺼내어 한낮의 적나라한 햇볕 아래에 탈탈 털어 바짝 말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딸들은 드디어 그 충충한 고민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