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에게 경력이란

결혼한 전남친 같은 것

by 김혜원


나는 어느 정도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가정에 충실’했다. 집은 안전하고도 아늑했다. 만약 결혼 후에도 계속 일을 했다면 분명 이런 것을 꿈꿨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집, 고요한 나만의 공간, 오전에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화한 햇살, 거기에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앉아있는 나……. 집안일 사이사이에 그런 장면은 분명히 있다. 고백하건대 그런 순간을 아름답게 SNS에 업로드하기도 했다. #여유 #일상 #행복 (잠깐 웃고 갈게요 ㅋㅋㅋㅋㅋ)


다시 말하자면 주부가 아닌 나에 대해 생각하면 곧장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나대로 치열하게 살았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경단녀’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뜻한다.) 그렇게 분류될 때마다 어쩐지 역할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한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은 멀고도 불가능하게 여겨졌다. 신박한 신조어인 양 굴지만 위축된 나에게 경단녀라는 말은 넌 이제 글렀어라는 말의 줄임말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다.


창업을 결심하기 전에 재취업의 희미하고도 미천한 가능성들을 주워 모으던 시기의 일이다. 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도 청이나 여성지원센터에 가면 취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강좌를 들을 수 있었다. 파워포인트, 엑셀,, 드론은 왜 있지,. 영상 편집 어쩌고저쩌고.. 뭔가 많았다. 그렇지만 그 강좌 신청서라거나 팜플릿을 멍하게 들고 있는 나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 삶을 다시 살아야 한다는 느낌, 이미 20대 초반에 했었던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에 아득해졌고, 그건 용기를 잃을 정도가 아니라 정말이지 거지 같았다.


한 번은 부끄러움을 뭉개고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제가.. 예전에 방송작가 일을 했는데요, 혹시 이 경력을 살려서 어디 뭐 공공 기관 같은 데서 아이들 책 읽기 지도를 한다거나,, 아니, 아니, 제가 당장 강의를 한다거나 이게 되는 수준인지는 모르니까 그냥, 이런 분들의 보조 같은 일은 없을까요?"

딱 봐도 선량하게 생긴 담당자는 더 선량한 표정으로 죄송하지만 그런 건 없다고 했다. 아, 없요. 네.


여기저기 수업도 많았고, 알아보면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것 같았다. 담당자가 바리스타 교육이 인기가 많다고 했다. 일 년 정도 시간을 투자한다면 분명 재취업은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경력 단절 여성은 언제든지 다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경력이 단절될 뿐이다. 응? 단절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단절이란 1. 유대나 연관 관계를 끊음. 2. 흐름이 연속되지 아니함. 한마디로 진정한 단절은 뎅강, 하고 잘린 삶의 한 단면과 안녕 하는 거다. 그러니까 이전의 삶에서 한 노력들을 미련 없이 잊을 수 있다면, 조건부의 희망이 거기 강의들에 있었다.


대학교 시절의 한 교수님의 생각난다. 푸짐하고 둥글둥글한 몸에 웃는 눈을 한, 평소에 인자하고 다정하기로 소문난 중년의 여자 교수님이었다. 나는 교수님과 인 동호회 비슷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약간 친한 사이가 됐는데, 그게 편했던지 둘이 있을 때 그분은 종종 문맥 없이 자기주장을 펼칠 때가 있었다.

“요즘 애들이 취업이 어렵다고 난리인데, 진짜 한심한 일이야. 그건 눈이 높아서 그래. 3d니 뭐니.. 하여간 조금 어렵고 힘든 일은 안 하려고 하니까. 조금만 눈을 낮추면 당장 들어가서 일할 데가 얼마나 많은데 ‘개나 소나’ 대학원을 가서 어쩌자는 거야? 다들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하니까 그렇게 도피를 하는 거지”


네?


"헛 참. 교수님 뭐라고 또 아무렇게나 씨부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지금 그 위치에서 교수님이 할 말이에요?"


나는 외쳤다. 마음속에서… 하지만 현실의 나는 그냥 끄덕끄덕 할 뿐이었고, 나도 대학원을 고려중이란 얘기를 이 분께 했가 안 했던가 하며 귀가 뜨거워질 뿐이었다. 아.. 그때 면전에서 이렇게 저렇게 렇게 말할 걸 하는 생각을 졸업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한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지금의 나에게도 소곤대는 것 같았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고르고 따지고 있어? 배가 불러서 그래, 개나 소나 다 좋아하는 일, 원래 하던 일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취업의 가능성에서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받고 귀가한 날, 안전하고 익숙한 집에 들어오면 맥이 풀렸다. 역시 집 밖은 위험하군. 다시 시작해서 내 자리 만들기가 보통 일이 아니야.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났어. 나보다 훨씬 어린애들이랑 경쟁해야 하는 거니까.. 일을 해도 내 새끼들 신경 쓰여서 불안하고 눈치 보일 게 뻔하지. 여기에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아? 청소며 빨래며,,, 아이들 케어며,,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 이게 바로 내 자리지. 시 인스타나 볼까 #일상의 행복 #스윗홈 #젊줌마


그만!!




나는 여우고 세상은 신포도 같았다. 자꾸만 밉살스럽게 고개를 흔드는 세상에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자리에서 콧노래라도 부르면서, 보란 듯이 행복게도 살았다. 그런데 스윗홈도 좋고, 좋지만, 사실 나는 그 얄미운 세상에서 따로 인정받고 싶었다. (다들 모르지만 사실은 나에게도 있었던) 내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다. 언젠가 그렇게도 살아본 기억을 억지로 지울 수는 없지 않은가! 집 밖은 진짜 신포도 일지 몰라도 인간에게는 단백질만큼 신포도도 필요다..



이전의 경력과는 별개로 부로서 화려하게 다시 재능을 피워내는 여자들을 종종 본다. 육아 멘토가 된다거나, 살림 유투버가 어서 공구를 하고, 행복한 가족 이미지로 SNS에서 인기를 모아 물건을 판다거나..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거의 전생처럼 느껴지는 이전의 경력을 되살리고 싶다는 건 어쩌면 미련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나도 저 사람처럼 새 삶을 살고 싶어! 심력을 모아도 보지만 이거나 저거나 왜 지난날을 무효로 쳐야 하는지는, 가슴은 커녕 머리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수학을 안다면 내 한 몸 안에서 두 명을 더 끄집어내고 이 정도 키웠으면 사회에 꽤 기여한 거 아닌가? 4인 가정의 소비경제를 담당하고 있는데 시장경제에 정말 아무 영향력이 없다 이거지? 내 10년은 절대로 경력으로 인정 못한다 이거지 이놈의 세상아? 답답해서 머리를 쥐어뜯자면 전의 그 개나 소나 교수님은 미래에서 온 자로, 나에게 닥칠 이 상황을 경고하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미친 생각에까지 이를 지경이었다. 업주부가 되기 이전에 고만고만하게 꾸준히 나 자신을 이끌어 오며 티끌 같은 경력을 모아 오던 나는 그저, 다시 그 티끌을 모으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굉장히 큰 포부이거나 욕심인 것 같지는 않은데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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