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요즘 아주 사랑하게 된 한 여자를 소개해보려 한다. 이름은 엘리자베스 조트.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지금 제일 뜨거운 소설, <레슨 인 케미스트리>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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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엘리자베스 조트는 화학자로서 뛰어난 과학적 재능을 가졌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과학계에서 배척당한다.그런 엘리자베스가 한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러다 우연히 TV 요리쇼를 진행하게 되면서 세상과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아아 스토리가 너무 재미있지만 스포를 피하기 위해 참을..)
책을 읽으며 새삼스러운 것은, 주인공이 직장에서 겪는 다채롭게 폭력적인 성차별이 벌어지는 배경은 불과 얼마전의 시대이고, 그게 지금이라고 해서 없는 일은아니라는점이다. 소설의 직설적인 문제제기는 여성으로서의 난감한 현실을 한 번 더 돌아보게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근데 그것보다 이 책이 가진 의미와 파워는, 역경을 반드시 넘어서는 한 불굴의 인간,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엘리자베스 조트라는 개성 있고 멋진 캐릭터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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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에서는 오랫동안 남주들은 냉정하고 완벽한 캐릭터, 여주들은 평범하고(어딘가 모자란)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공식처럼 존재해왔다. 이유가 뭘까? 표면적으로는 여성들의 공감을 쉽게 얻기 위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여성이 가질만한 성격적 특성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성과 과학은 남성의 것이고, 감성과 직관은 여성의 영역이라고 자의적인 선을 그어왔다. 섬세한 감정으로 타인을 돌보는 것을 여성만의 과업으로 미루는 한편, 또한 그것을 이유로 중요한 결정에서 여성을 배제해왔다. 과학적 사고가 중요해질수록 감정은 이성에 비해 열등함으로 인식되고 '히스테릭하고 감정에 잘 휩싸이는' 여성에 대한 편견은 여성을 불신하고 차별하며 때로는 혐오하도록 은연중에 허락하는 셈이었으니, 소설 속 남주와 여주에 대한 설정 역시 그 테두리를 벗어나기 힘들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엘리자베스처럼 관성에서 벗어난 캐릭터를 발견하면 정말이지 기분이 상쾌하다. 이제야 현실이 그나마 좀 반영되고 있다는 안도감이라고나 할까.
때는 여성의 자리는 가정뿐이라고 여겨지던 50년대 미국이다. 'TV 속 여자는 꽉 끼는 옷을 입고 예쁘게 머리를 부풀리고 섹시하고 묘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제작자의 협박을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화학과 인생에 대한 돌직구를 날리는 엘리자베스 조트를 보면서 나는 소설 속 시청자들처럼 열광했다. 어디서 이런 여자가 나타났을까? 엘리자베스 조트는 남들의 요구가 아닌 자기 자신의 요구를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의식한다. 배려하고 눈치 보느라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싸우지도 울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그저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아니오"라는 말을 무한으로 반복할 수 있다. TV 앞에 앉은 여자들은, 화면 속에서 진지하고 유능한 자신을 드러내길 전혀 망설이지 않는 이상한 여자를 보았고, 무언가를 깨달았다. 무려 2022년의 내가 깨달을 것과 아마도 같은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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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마늘 반쪽을 쪼개 스테이크에 문지르신 다음 염화나트륨과 피페린을 양면에 뿌려주십시오. 그리고 버터에 거품이 일면 스테이크를 프라이팬에 넣으십시오.(...) 반드시 버터에 거품이 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거품이 난다는 건 버터의 수분이 끓어 날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스테이크가 H2O를 흡수하지 않고 지방질로 구워지기 때문입니다."(2-126p)
요리가 화학이라는 선언은 그녀의 시청자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매일 세 번의 밥을 하는 게 세 번의 화학 실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마치, 달에도 뒷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과도 같다. 그건 단순히 일의 중요도나 난이도의 차이가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이다. 요리가 화학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주부인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묻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뒷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화학은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룹니다. 그 말에 따르면 화학은 바로 삶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파이처럼 삶에는 튼튼한 토대가 필요합니다. 가정에서는 바로 여러분이 그 토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데도 세상에서는 가장 저평가되고 있지요." (2-81p)
"화학은 변화입니다. 자신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용기는 변화의 뿌리라는 말을요. 화학적으로 우리는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다짐하십시오. 무엇도 나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는 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규정하지 말자고. 누구도 더는 성별이나 인종, 경제적 수준이나 종교 같은 쓸모없는 범주로 나를 분류하게 두지 말자고. 여러분의 재능을 잠재우지 마십시오, 숙녀분들. 여러분의 미래를 직접 그려보십시오. 오늘 집에 가시면 본인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시작하십시오." (2-2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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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인 케미스트리>는 한 여성의 위대한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자,여자는 눈물과 콧물 없이도 이성적으로 공감하고 사랑하고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이야기이다.(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다려온 새로운 유형의 여주인공이 주류로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즐거움이다. 엘리자베스 조트는 나에게 가지각색의 고난과 역경을 대하는 가장 강력하고 배울만한 태도를 가르쳐 주었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고, 인정받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모든 차별은 과학적으로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무식하다는 표시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정도면 정말. 확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진다. 애플 TV로 제작 중이라고 하는데, 이 멋진 언니가 어떻게 그려질지 정말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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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네가 선택하는 것들. 네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너를 너답게 만든단다."(2-60p)
"일터에서의 성차별에 어떻게 대처하나요?"
"폭력적인 해결 방법이 몇 가지 생각납니다만, 그 경우 동료들이 국민참여재판 배심원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징역을 선고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집행유예를 받지 못하면 결국 영치금을 받는 신세가 되겠지요. 제가 정말로 추천하는 방법은 애초에 왜 성차별이 존재하게 되었는가 생각해보는 겁니다. 성차별은 성별을 이용해 권력과 경쟁의 영역을 좁혀가는 전략입니다. 편견을 '생물학적 사실'이라고 조작하며 타인의 재능을 배제한다는 걸 알아두십시오. 공포에 근거한 이런 전략은 인종차별이나 동성애 차별 등 온갖 다른 차별에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전략에 맞설 때 저는 한 단어만 사용합니다. "아니오"라고요. "아니오."라는 말을 지겨울 정도로 반복합니다. 결국 제 말이 통할 때까지요."
(엘리자베스 조트 가상 인터뷰 중)
"저는 캘빈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캘빈은 총명하고 상냥하기도 했지만, 나를 진지하게 대해준 최초의 남자였으니까요. 모든 남자가 여자들을 진지하게 받아준다고 생각해보세요. 교육이 바뀔 겁니다. 노동력에는 일대 혁명이 일어날 겁니다. 결혼정보회사는 파산할 겁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로스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2-191p)
맞아. 나는 왜 여자들이 결혼하면 중고차 바꾸듯이 옛 성을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어. 성은 물론이고 가끔 이름마저 잃어버리잖아. 존 애더스 부인! 에이브러험 링컨 부인! 마치 자신의 예전 모습은 가주어처럼 치부하고 새로 얻은 남편의 이름으로 진짜 사람이 된 것처럼 여기지. 치터 딕먼 부인이라니. 무기징역 선고 같아." (1-92p)
"있잖아, 이런 전통을 만든 건 내가 아니야. 세상 이치가 그렇다고. 여자가 결혼하면 남편 성을 따르게 되어있어. 그리고 99.9퍼센트의 여자들은 만족하면서 살아."
"그 주장에는 근거가 있겠지?"
"뭐가?"
"99.9퍼센트의 여자들은 만족하면서 산다는 거 말이야."
"음, 없어. 하지만 불만을 가진 여자가 있단 소리는 못 들어봤어."
"네가 성을 바꿀 수 없는 이유는 네가 유명해서라고 했지. 하지만 99.9퍼센트의 유명하지 않은 남자들도 자기 성을 유지하면서 살아."
(1-99p)
"앨리자베스 조트, 너는 세상을 바꾸게 될 거야."
캘빈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 밖에 낸 순간 사실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세상에 필요한 아주 혁명적인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제아무리 반대파들이 몰려와도 불멸의 존재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그것 증명이라도 하듯 벌써 첫 번째 추종자를 달고 오지 않았나. (1-103p)
"엘리자베스는 그 자신감을 씨앗처럼 뿌렸고 그것이 마침내 상대방에게 뿌리내려 자라도록 했다." (2-23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