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희곡)

사랑의 소통

by 김은정

부활



김은정 작가



인물

최고나 (여, 45세) 이신고의 조카

김세지 (여, 65세) 고나의 외숙모

박희지 (여, 28세) 콜센터의 동기

고객 1 (여, 40세) 음성통화

이수호 (남, 34세) 김세지의 아들

이신고 (남, 67세) 김세지의 남편

최선수 (남, 50세) 신경 정신과 의사

댕댕이 (수컷, 1세) 웰시코기



제1막


공간


제1장 콜센터 사무실


고나, 영양식품 교육장 책상에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있다. 옆 사무실은 어수선한 분위기로 웅성대며 각자의 자리에서 컴퓨터를 켜고 있다. 교육의 과로로 밤잠을 설치다가 일어난 고나의 짧은 컷의 머리카락은 삐죽삐죽 곤두서 있다. 그리고 립스틱을 재빠르고 둥글게 입술에다 오렌지색으로 뭉텅하게 바른다. 잠시 멈추고 커피 알갱이를 종이컵에 왕창 쏟아붓고는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다. 40대지만 30대처럼 보이는 동안의 얼굴엔 굵고 검은 테의 안경을 쓰고 있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메모해 온 일지를 한 장씩 한 장씩 넘겨 본다. 그때 희지가 교육장으로 들어온다.



고나 좋은 아침!

희지 안녕하세요. 우산도 없이 걸어오는데 소나기가 퍼붓네요.

고나 (안쓰럽게) 우선 이 손수건으로 머리와 얼굴 좀 닦아. 날씨도 쌀쌀한데 감기 조심하고.

희지 고마워요. 언니.

고나 (호기심 가지며) 어제 카톡으로 보내온 우수 콜 들어 봤어? 원콜 오케이 계약 말이야.

희지 아, 네. 어제 그 원콜 계약 건요. 고객이 반론을 제기하는 순간 긴장감 드는데도 잘 이끌어 갔었죠.

선배들처럼 우리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돼요. 지금 당장은 앞이 안 보이니깐 불안한 거 있죠.

고나 (어깨를 펴며) 그렇지! 누구든 마찬가지 아닐까. 이런 상황을 앞두고 우리는 시간을 투자해야잖아.

작은 물방울이 바윗돌을 쪼갠다는 말 들어봤어?


그들은 교육장 밖으로 나간다.

긴 책상이 가로로 길쭉하게 놓여있다. 그 위에는 헤드셋과 전화기 두 대와 스크립트가 가지런히 펼쳐져 있다.

고나는 영양식품 설계사 역할을 맡고 희지는 고객이 되어서 연습한다. 고나는 희지에게 전화를 건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희지 여보세요?

고나 안녕하세요. 희지 고객님 되시죠.

최근 출시된 상품으로 해피 바이러스를 안내해 드리고자 전화를 드렸어요.

희지 해피 바이러스요? 그게 뭔데요.

고나 하루에 단 한 알만 드셔보세요.

피로로 축 처지거나 짜증이 심하게 올라올 때, 몸에서 갑작스러운 열이 발생할 때,

스트레스로 어디론 가 뛰쳐나가고 싶을 때, 호르몬을 조절해 주거든요. 우울하실 때 있잖아요.

그런데 이 한 알을 하루에 매일 한 번만 드셔도 온 세상이 환해지면서 마음도 밝아지는 효과가 있어요.

희지 아, 예-

고나 정말 건강에 좋은 상품이거든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바로 주문하셔요.

희지 아, 근데 저는 피로를 회복하는 비타민제를 복용하고 있거든요.

고나 아, 그렇지요. 요즘 사람들은 기본으로 그렇게 드시잖아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죠. 좀 더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희지 그럼 해피 바이러스 먹고 좋아진 사례가 있으면 말해 주실래요?

고나 (잠시 머뭇거리며) 아, 그건 아, 예- 아 그건.


갑자기 전화기가 ‘뚜-뚜-뚜’라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희지는 고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수고했다고 어깨를 토닥거린다.


희지 고나 언니. 괜찮아요?

고나 (말을 더듬으며) 아—니. 지금 내 정신이 멍해. 고객이 만약 뭐라고 묻잖아.

그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식은땀만 나고.

희지 언니, 이건 실전을 위한 단지 연습일 뿐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하면서 내가 부족한 부분이 뭐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다듬어 가는 거잖아요.

고나 (한숨 쉬며) 복잡해. 난 여유가 필요해.


고나와 희지는 억눌러진 어깨를 들어 올리며 무대 밖으로 걸어간다.



제2막


제1장


창 너머 서쪽으로 일곱 무지개가 뜬다.

무대엔 문이 서 있다. 문 안쪽으로는 소파가 있고 다른 쪽에는 식탁이 놓여있다.

고나 외숙모인 세지가 소파에 앉아서 문을 향해 얼굴을 돌린다.

남향으로 작은 세지 방에는 침대와 화장대가 보인다.


고나 (문을 열며) 외숙모! 저 왔어요.

세지 (화가 난 듯 양팔을 접고) 뭐야. 왜. 이렇게 늦게 다녀.

고나 (눈치챈 듯) 최근에 얻은 직업이라서 바로 칼퇴근을 못하겠더라고요.

조금 익숙해지면 일찍 다니도록 할게요. 어머, 벌써 저녁 일곱 시네요.

외숙모, 배가 엄청 고프시죠? 제가 얼른 저녁 식사 준비할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세지 (못마땅하듯) 네가 하는 꼴들이 다 그렇지 뭐.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지. 오늘 얼마 벌었어?

고나 아--직, 0원요.

세지 (코웃음을 치며) 고나. 네가 우리 집에 입양되어 온 이후로 집구석이 제대로 안 돌아간다.

그건 알고 있니? 오늘 당장 밥하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이불 세탁도 해 둬라.

고나 (똑바른 목소리로) 삼촌이랑 외숙모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저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그때는 제가 세 살이었죠.

아는 친척이라고는 단지 외삼촌밖에 없었잖아요.

외숙모가 받아주지 않았으면 저는 아마도 고아원에 버려졌겠죠.

세나 (한쪽 눈을 추켜올리며) 얘가 왜 이리 말이 많아?

외삼촌도 집을 비우고 코빼기도 안 보이고 소식도 없고. 집구석이 개판이잖아.

내가 너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 줬는데 양심이 있다면 네가 나에게 이 정도를 해도 부족해.


고나는 말없이 주방으로 건너간다.

한쪽 방에는 세지 화장대가 보인다. 그 위에는 신경안정제 약이 올려져 있고 화장대 거울은 날카로운 것으로 긁혀 있다.


고나 (무표정으로) 우선 저녁 식사부터 준비한 후 방청소와 이불 세탁해 둘게요.

세나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너는 외삼촌이 요즘 왜 집에 안 들어오는지 알고 있지.

외삼촌이랑 서로 연락하면서 나만 모르게 빼뒀지?

고나 (가슴을 치며) 외삼촌과 조카인 저는 사랑하는 사이예요.

어떻게 조카를 의심할 수가 있어요. 외숙모는 제가 눈에 가시는 아니라는 걸 알아요.

외숙모 제가 밥 짓는 동안 잠깐 좀 주무세요. 그럼, 마음이 편안해질 거예요.


세지는 고나가 세 살 때 양녀로 데리고 왔다. 세지 남편의 기나긴 부탁으로 받아들여졌다. 세지는 외동아들 수호가 있다. 삼촌 이신고는 아들 수호보다 양녀인 세지를 더 좋아했다. 무척 순하고 예뻤다. 특히 큰 눈동자는 맑았다. 세지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질투가 쌓여갔다. 고나에게서 남편의 사랑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며 복수의 칼을 품고 살아갔다. 그런데 어느 날 집 나간 후 소식이 없었던 세지 남편 이신고가 한탄강에서 투신자살했다고 경찰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원인불명의 사건으로 시체도 부검해 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죽은 남편을 본 세지는 정신적 충격을 받고 신경과에서 신경안정제 약을 복용 중이었다. 그날 이후 세지는 고나가 직장에서 생활하는 동안 혼자서 벽만을 바라보며 지낸다. 세지는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죽은 남편의 혼령이 세지의 목을 졸랐고 잠들려고 하면 할수록 온몸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새벽 비명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그때는 새벽 1시쯤이었다. 고나는 외숙모의 몸을 크게 흔들어서 깨웠다.


고나 (혼자 생각하며) 외숙모가 한 달째 이승과 저승을 오가고 있어.

돌아가신 외삼촌은 과연 세지 숙모를 사랑했을까? 늘 각방을 쓰고 대화도 없이 살아온 세월을 두고 그들은 과연 부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숙모는 의부증이 너무 심해.

사실 외삼촌은 인물이 뛰어나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무척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아내는 아내고 일은 일인 것을. 이런 이유로 외숙모는 삼촌이 용납 안 되는 것일까?

외삼촌은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식품공장을 인수하려다가 그만 자금 부족으로 무너지고.

이런 상황에서 사이에 낀 내 인생이 정말 깜깜해.

세지 (짜증을 내며) 고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밥 하다 말고.

고나 (깜짝 놀라며)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세지 (우습고 어이가 없는 듯) 네가 하는 일이 전부 그렇지. 넌 욕심이 너무 많아. 생각해 봐.

느닷없이 퇴사하지 않나. 게다가 뜬구름 같은 영양식품 일을 한다고 밤새 수선을 떨지 않나.

너를 보면 한심해.

고나 (가슴 아파하며) 저도 힘들어요. 외숙모. 외삼촌도 안 계시잖아요. 이젠 제가 가장이에요.

세지 제 좀 봐! 눈을 부릅뜨고 나에게 달려드는 것 좀 봐. 어이가 없어 죽겠네.

그래서 사람들은 ‘머리 검은 짐승은 절대 거두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잖아.

잠깐 자는 모습도 짐승 같아.

고나 (심호흡하며) 식탁에 저녁밥 차려 뒀으니 맛있게 드세요. 저는 바로 화장실 청소할게요.


사이.


제2장


세지의 침방이 보인다. 시트가 흐트러져 있다. 그때 초인종 벨이 울린다. 세지의 친아들 이수호가 나타난다. 그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세잔과 조각 케이크를 양손에 들고 있다.


고나 (반기며) 연락 없이 갑작스레 웬일이야? 수호.

수호 지독한 여름날 안부 인사 못 드렸더니 몸이 간질간질하더라고. 엄마는 요즘 어때?

고나 아휴! 미치겠다. 미치겠어. 내가 외삼촌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어.

수호 신경 병원 처방전 약은 잘 드시고 있는 거야?

고나 방에 가보면 신경 약 몇 알이 구석에 박혀있어. 약을 흘린 건지, 약을 몰래 숨기는 건지 알 수 없어?

수호 (엄마 방에 노크한다) 엄마 나왔어. 사랑하는 아들 왔는데 반갑지도 않아?

세지 (무뚝뚝하게) 어쩐 일이야?

수호 무슨 이런 투박한 말투야. 요즘 너무 바빠! 안부 전할 시간도 없었어.

세지 너도 변명이야? 네 엄마가 꼴 보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 저리 가 버려.


또다시 싸늘한 기운이 맴돈다.

세지는 아들 수호가 죽은 남편으로 보인다.


세지 (큰 소리 지르며) 죽다가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났어?

이 새끼야. 네가 뭔데 나를 괴롭혀?

수호 엄마, 정신 차려. 나야, 나라고. 엄마 아들이라고.

세지 (수호를 밀치며) 저리 꺼져.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이 개새끼야.

고나 (수호 팔 잡으며) 약 기운이 다 됐나 봐. 저러다가 언제 그랬냐이지.


세지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뜯으며 불안하듯 집게손가락으로 칭칭 감는다. 고나는 외숙모가 안정될 때까지 잠시 피해 있는다. 거실의 불빛은 점점 사라져 간다.

장면이 바뀐다.


제3장


해가 뜬다.

이른 아침 고나는 도시락을 챙겨서 출근한다. 걸음의 폭이 점점 넓어질수록 숨 가쁜 소리가 난다.


희지 (불안하듯) 일정이 너무 빽빽해. 고나 언니, 난 집에 도착하면 넋이 나가버려.

고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맞아. 세상살이 쉬운 것 봤냐? 실전의 카운트 날 다가온다. 앞이 깜깜해.

희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고나 (손에 힘을 불끈 쥐며) 가야지. 우리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가는 거야.

희지 오늘도 서로 역할극 해봐요. 시간 없어요. 촉박해요.


벽면에는 선배들의 얼굴로 연예인 사진들이 크게 걸려있다. 팡파르 소리가 여러 차례 울려 퍼진다. 선배들의 계약 성공 소식이다. 주눅 든 고나와 희지는 선배 얼굴을 보려고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고나 (벽면의 사진을 보며 ) 선배들 너무 멋져요.

희지 (입술에 힘주며) 나도 할 수 있어. 두고 보라고.

고나 한 달에 몇 건을 해야 생활비가 될까.

희지 첫 달부터 터트려야죠.

고나 네 말대로 내일은 없어. 단지, 이 순간뿐이야.

희지 마지막 날처럼 오늘도 계약을 향해서 불태워 보아요. 우리.

고나 좋아. 힘내.


고나는 눈을 감는다. 전화는 대기 상태다. 여기저기서 전화벨이 울려댄다.


고나 (전화를 받으며) 안녕하세요? 달님 고객님 맞으시죠?

고객 1 네, 그런데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나요?

고나 (자신 있는 목소리로) 네,

저희가 별 쇼핑 고객님들 중에서 마케팅 동의하신 분들 쪽 우선으로 안내를 드리고자 연락을 드린 건데요. 최근에 나온 해피 바이러스 들어보셨나요?

우울하거나 불면증으로 힘들어하시는 분들 그리고 스트레스로 괴로우시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해피 바이러스가 도와드려요. 딱 한 달만 섭취해 보셔요.

몸의 에너지가 회춘이 되는 것을 느끼실 거예요.

고객 1 그럼, 그렇게 좋은 거면 한 번 먹어 봐야겠네요. 해피 바이러스 가격은 어떻게 되나요?

고나 카드로 하시면 3개월 할부되고요. 30%의 할인 혜택도 있어요.

고객 1 요즘 제가 몸이 자꾸만 가라지고 의욕도 없어지고 힘겨웠는데 한번 신청해서 먹어 볼게요.

해피 바이러스요.

고나 정말 고맙습니다. 고객님, 저를 믿어 주시니 더더욱 감사드립니다. 그럼, 바로 진행해 드릴게요.


고나는 표준약관을 읽으며 녹취를 진행한다.

계약이 완성되자 벽면 뒤에서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들려올 때 희지와 고나는 퇴장한다.


사이.


제3막


제1장


신경정신과 병원의 간판이 세워져 있다.

진료실에 의사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수호는 어머니의 증상 호전에 관한 상담을 위해 문밖에서 대기한다.

문이 열리자 수호는 들어간다. 대머리인 의사와 수호는 눈을 마주한다.


수호 (정중하게)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의사 그러네요. 어머니는 잘 계시죠?

수호 (머리를 긁적이며) 그게, 으--음,

의사 무슨 일 있나요?

수호 요즘 이상하게도 타인에 대한 의심도 커지고 욕설까지 하세요.

의사 제가 처방해 준 약은 매일매일 잘 드시나요?

수호 그-게, 함께 지내고 있는 사촌이 말하기를 손 떨림 증상도 심해진다고 하더라고요.

의사 아마도, 남편을 갑작스럽게 잃고 나서 불안증이 일시적으로 밀려들 수 있어요.

수호 (걱정스럽게)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의사 주변이 너무 밝으면 조금 어둡게 환경을 만들고요.

소음이 심하게 일어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환자는 불안해지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리죠.

수호 네, 그건 환자에게 자극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인가요?

의사 그렇죠. 심리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니깐요.

제가 처방전에 잠을 좀 잘 수 있도록 약을 하나 더 추가해 드릴게요.

어머니를 잘 보살피도록 하세요.

수호 (안심하며) 그렇게 하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의사와 상담이 끝나자 수호는 정중히 인사하며 나온다. 집으로 향해 가는 동안 수호는 어머니에게 무관심했던 자신을 생각한다. 수호는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자주 안부 전화를 드려야겠다.라고 다짐해 본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식품공장 사업이 패하자 매일매일을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는 어디에도 마음을 풀대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그러다가 점점 빚 독촉이 발생하자 말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후 혼자가 된 세지는 마트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어느 날 한탄강에서 남편이 투신한 소식을 듣는다. 세지는 충격으로 뇌신경이 손상된다.

수호는 주식회사에서 우수한 기획 업무 성과에 인정을 받고 과장으로 승진한 상태다. 수호가 지난 일들을 생각하며 걷는 동안 애완견 가게가 눈에 띄었다. 그러자 수호는 혼령에 이끌린 듯 슬그머니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둘러보는데 태어난 지 1주일 지난 웰시코기 강아지 한 마리가 보였다. 수호는 보자마자 그 이름을 댕댕이라고 불렀다. 강아지는 수호를 보자 주인을 만난 듯 반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수호는 이산가족이 힘겹게 만나서 한 가족이 된 듯 이후 고민도 없이 바로 댕댕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향한다. 벨을 누르자 세지가 문을 연다.


세지 (놀라며) 도대체 뭐야? 웬 강아지야? 아침 일찍 나간 이유가 이 귀여운 강아지를 보러 갔던 거야?

수호 (댕댕이를 건네며) 엄마, 놀랐지. 얘는 댕댕이라고 해. 댕댕아, 이젠 이분이 네 엄마야. 인사해야지.

세지 (밀치며) 저리 치우지 못해. 어머, 징그러워. 싫어- 싫어- 싫다고.

털이 있는 동물은 싫어. 내가 왜 강아지 엄마야. 수호 너 미쳤어?

수호 (댕댕이를 쓰다듬으며) 엄마, 강아지가 듣잖아. 그렇게 사납게 말하면 댕댕이가 놀라잖아. 댕댕아, 괜찮아. 놀랐지?


댕댕이는 내려 달라고 몸부림을 치자 수호는 거실에 내려둔다. 그러자 갑자기 화난 듯 세지 주변을 맴돌며 사납게 짖는다. 이를 피하려고 세지는 도망을 다닌다. 한참 실랑이가 벌어진다.


사이.


제2장

고나가 퇴근하면서 구운 고구마를 품에 안고 들어온다. 현관문이 열리자 댕댕이는 처음 본 고나를 보고 마치 알았든 관계였듯이 꼬리를 마구 흔든다. 이후 거실은 차츰 조용해진다.


고나 (황당하듯) 웬, 강아지야? 아이, 귀여워.

수호 (웃으며)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꾸만 손짓하듯 발걸음이 애완 가게에서 멈춰지더라고.

그래서 들어가 보니 애완견이 하도 귀여워서 데리고 왔어. 엄마 보고 돌보라고 해야겠어.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주변이 적적하니 약한 자를 돌보다 보면 정서적으로도 좋을 것 같아서.

고나 뭐! 외숙모가. 신경증 환자인데. 강아지를 어떻게 돌본다는 거야.

수호 지금은 낯설지만 가까워지겠지. 시간이 약이잖아.

아무리 불면증 약이다. 신경과민증세 약에 의존만 하기에는 세월이 너무 무색하잖아.

혹시 알아? 댕댕이가 힘이 될지 말이야. 비록 작고 미약한 동물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인간이 너무 편하게만 있어도 치매가 올 수도 있잖아.

하루 반나절 너도 직장에 있고, 엄마 혼자서 지내면 심심하잖아.

댕댕이가 있으면 먹을 것도 챙겨주고 놀아 줘야 하고 일이 생기면 두뇌도 원활하게 돌아가고

팔, 다리도 훨씬 많이 움직일 수 있으니깐 아무래도 좋지. 안 그래?

고나 (고개를 흔드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만 그건 우리의 바람이지.

현실로 봐서는 외숙모 상태가 댕댕이에게 분노로 순간 살인을 저지를까 걱정도 되잖아.


사이.


제3장


고나와 수호 그리고 세지는 소파에 앉는다. 댕댕이는 세지 옆에 앉아 있다. 세지는 사 온 고구마를 접시에 담아서 탁자에 두고 간식으로 먹는다. 댕댕이도 코를 킁킁대며 먹으려고 하자 수호는 강아지를 무릎에 올려두고는 우유를 먹인다. 세지와 고나는 그 모습에 시선을 모은다.


고나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댕댕이가 의외로 낯선 장소에서도 적응을 제법 잘한다. 신기하네.

수호 (어깨를 세우며) 아무렴. 누가 데리고 온 강아진데.

고나 (대견하듯) 참. 큰일을 했네. 수호. 집에는 언제쯤 돌아갈 거야? 벌써 3일 째야.

수호 (손을 흔들며) 휴가를 1주일 냈거든. 엄마 상태를 좀 봐야 해서. 걱정도 되고. 고나가 그동안 엄마를 챙겨주느라 고생이 많았지?

고나 (의아한 듯) 아니야, 당연히 함께 살고 있는 내가 해야 할 일이지.

나도 엄마 아빠가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이 거두어 주셨잖아.

은혜를 갚아도 죽기까지는 부족하지. 그렇잖니?

수호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고나 (웃으며) 이제 식구가 한 명 더 늘었네. 귀여운 댕댕이가 태어났으니깐 말이야.

그런데 댕댕이를 보니깐 왠지 외삼촌이 자꾸만 떠올라. 느낌이 꼭 외삼촌 같아.

수호 (눈을 크게 뜨며) 너도 그래? 나도 그렇거든. 조금 이상하지 않아?

애완견을 안고 있는데 꼭 사람을 안고 있는 것 같아.

세지 (하품하며) 왜 이렇게 피곤하지? 난 한숨 자야겠어.

고나 그래요. 외숙모, 방으로 모셔 드릴게요. 한숨 주무세요.


사이.


제4장


고나는 세지를 방으로 모시고 간다. 댕댕이도 함께 따라간다.

수호는 외출한다. 한참 뒤 애완견 소품집에서 댕댕이가 생활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하얀 집을 들고 온다.


고나 (기뻐하며) 벌써 다녀왔어? 우와. 댕댕이는 무척 좋겠다. 정말 아늑한 집이네.

수호 이 제품이 제일 잘 나가는 거래.

딱 한 개 남은 거 얼른 구매했지.

고나 역시. 수호는 안목이 넓구나.

수호 그럼. 내 눈이 얼마나 높은지 몰랐어?


이때쯤 방에서 잠든 세지가 꿈을 꾼다.

소리를 지르며 뭔가를 쫓아내듯 팔을 휘젓는다.


세지 (눈이 감긴 채) 저리 가. 왜 나를 자꾸만 괴롭히는 거야.

혼령 나와 함께 가자. 내가 있는 곳은 아늑하고 평화로워.

세지 한탄강에 뛰어든 주제에 무슨 헛소리야. 자식도 버리고 아내도 버리고.

혼령 내가 욕심이 넘쳤는지도 모르지? 그건 잘살아보려고 그런 거잖아.

세지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지금 난 당신에게서 배신감이 느껴져.

이제는 귀신이 되어서 나의 발목까지 붙잡겠다는 거야?

나에게 의논 하나도 없이 혼자서 살고 죽고 당신은 배신자거든.

혼령 (세지 목을 조른다) 너도 죽어. 나 혼자 가고 싶지 않아.

이 악마야. 고나를 그만 괴롭혀. 뭐가 불만이야. 왜? 고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야. 내 조카를.

세지 (발로 걷어차며) 꺼져버려. 저리 가. 당신은 언제 나를 아내로 생각한 적 있어? 있느냐고?

항상 고나만 감싸고 맴돌았잖아.

내 말은 들은 척 만 척 언제 무슨 일 생기면 나랑 의논한 적 있어? 없잖아.

어—어. 네가 사람이냐? 당신은 도대체 누구랑 결혼을 한 거야?

난 말로 표현도 못하고 아픈 상처를 닫고 살아왔어. 이젠 당신은 필요 없어. 저리 꺼져버리라고.

혼령 (몰랐다는 듯) 내가 핏줄에 너무 집착했나 보군.

사랑하는 누님의 딸이라 너무 불쌍해서 아내인 당신보다는 내 가슴엔 고나가 더 크게 자리해 있었 나 보네. 그게 몸에 뵈어서 당연하게 살다 보니 당신에게 상처가 되는 줄 몰랐어.

지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겠어.

지금은 나의 부족함으로 가족을 다 버리고 한탄강에 뛰어들어 망령이 되었지.

현재 이렇게 떠돌아 헤매는데 이제 내가 편히 눈 감을 수 있도록 용서해 줘. 세지 씨.

당신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세지야.


혼령은 사라진다.

세지 방에서 큰 소리가 나자 수호와 고나는 달려간다. 문을 열자 세지는 식은땀을 흘린 채 머리카락은 사납게 흐트러져 있다. 이틀 간격으로 밤마다 세지는 가위에 눌린다. 댕댕이도 방으로 들어온다.


고나 (놀라며) 외숙모가 가위눌리는 꿈을 또 꾸셨나 봐. 정말 피 말라.

숙모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시트를 찢었겠어. 수호 저것 좀 봐. 잠들기만 하시면 자꾸만 혼령이 보인데.

수호 (혀를 차며) 몸이 허약해서 그래. 불면증으로 더한 거고.

고나 (외숙모에게 다가간다) 숙모 다시 침상에 누우세요. 제가 곁에서 지키고 있을게요.

세지 (몸을 떤다) 내가 깨어날 때까지 지키고 있어야 해.

고나 (다독거리며)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고나와 수호는 세지 옆에서 지키고 있다. 평화로운 얼굴을 하며 잠든 세지를 보며 수호는 창밖을 본다. 창밖으로 앙상한 나뭇가지에 나뭇잎은 다 떨어지고 다만 네 잎만 남아서 붉게 물들어 간신히 붙어있다. 깊이 잠든 세지를 본 수호와 고나는 거실로 나온다.


수호 (창밖을 보며) 휴가도 어느새 다 지나갔네. 내일 출근해야 하니깐 짐을 좀 챙겨야겠어.

고나 그래. 네가 오랜만에 오니깐 정말 좋다.

덕분에 가족도 늘고. 댕댕이랑 친해지도록 애써 봐야겠어. 댕댕이도 피곤했는지 집에서 잠들었네.

수호 다음 휴가 때는 엄청나게 자라 있겠지. 기대되는걸. 가끔 댕댕이 사진 좀 보내 줘.

고나 그래. 알았어.


사이.


수호는 퇴장한다.


무대에는 세지, 고나, 댕댕이가 소파에 앉았다.

세지 주변으로 댕댕이가 맴돈다. 그러자 세지는 댕댕이에게 분유를 먹인다. 세지는 고나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모습을 보인다.


세지 (상냥하게) 고나, 댕댕이가 온 날부터 집안이 밝아졌어. 그렇지?

고나 그러게요. 수호에게 고맙다고 편지를 보내야겠어요.

세지 댕댕아, 맛있니? 엄마가 물도 가져다줄게. 천천히 먹어. 체하겠어.


고나는 숙모의 얼굴이 환해지자 신기하게 쳐다본다.


고나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이런 날도 있다니.

세나 댕댕이가 간식 다 먹고 나면 같이 외출하자.

고나 (잠시 머뭇거리며) 외숙모, 정말이에요. 알겠어요.


세나는 먼 시간 동안 지옥을 다녀와서 환생한 듯 20년은 젊은 발걸음으로 댕댕이의 목줄을 잡고 고나와 함께 외출한다.

밖에는 평화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