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저씨네 토끼

by 엘리

중학교 수업시간, 선생님을 피해 몰래 교과서에 끼워 보던 만화책 중 하나는 집에서 토끼와 함께 사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그 시절에는 나와 같은 나이대의 만화 속 인물이 자기보다 어린 아기를 돌본다거나 상대적으로 약한 동물과 같이 지내며 겪는 성장에 관한 내용의 만화책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화책 토끼와 나?(정확한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에서는 토끼가 생각보다 똑똑하고, 잡식성이며 똥을 많이 싼다는 내용과 집안에서 어려움이 많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힘들어도 같이 살고 있는 주인공의 복잡한 마음이 주를 이룬다. 정말 토끼가 그런 동물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즐겁게 읽었던 기억.


막연하게 토끼 너무 귀엽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고 어렵게 자리 잡았던 부모님의 사업이 어려워져 말 그대로 빚더미에 앉게 된 우리 가족은 흙으로 지어진 아주 오래된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토끼를 만나게 될 줄이야. 이사한 곳의 집주인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된 집에 세를 놓았고 그중 바깥채에 청년이 한 명 살았는데, 나는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우리 집 현관문과 분리되어 있긴 했지만 마당은 같이 쓰는 구조라 그 마당에 토끼장을 놓고 아저씨가 키우고 있었다.

아저씨네 토끼는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가둬진 채로 생활했기에 벽지를 뜯거나 책, 휴지를 엉망으로 씹어 놓는다거나 하는 말썽을 기대할 수 없어 앞서 말한 만화책의 내용을 알아볼 기회가 오지 않아 아쉬웠다.


작고 하얀 토끼와 몸집이 조금 더 큰 베이지색 토끼가 그 짧은 다리로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오물오물 거리는 모습을 보는 그 시간만큼은 집안 살림에 대한 걱정이 늘지 않아 좋았다.

부채가 늘어나며 휴학하고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평일에는 일했고, 쉬는 주말 오전에 나와 토끼들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곤 했는데 그 순간에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불안의 그늘이 내 머리 위에서 거둬지는 기분이 들었다.

부모님이 경주에서 하던 사업이 잘 되고, 가족사 때문에 대전으로 이사 오면서 더 나은 집으로 이사 올 수 있어 좋았는데 10년도 되지 않아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하는 것이 짜증도 나고 답답하기도 했었다.


주말 오전에 마당에 나와 그렇게 마음의 엉킨 부분을 풀어내는 동안 아저씨는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나와 9~10살 정도 차이가 났던 것 같은데 거의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7~8시쯤 들어오던 그 아저씨는 집에서 거의 식사를 안 하는 것 같았다. 아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진 않았어도 토끼장의 배변 패드와 수통, 사료 그릇을 더럽거나 악취 나게 방치하지 않았고, 어쩌다 집에서 쉬는 날 가끔 나와 토끼들을 풀어놓고 뭐라 뭐라 말하는 아저씨 목소리도 들리곤 해서 '토끼들을 아끼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가끔 비가 오면 부침개를 부쳐서 아저씨께 건네곤 하던 엄마의 접시를 되돌려 주려 아저씨가 우리 집 현관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주머니. 이번 달 전기요금하고요, 여기 접시요. 잘 먹었습니다.

(공간은 나뉘어 있으나 전기세는 한집으로 나와서 전기세의 일부를 엄마에게 전달했다.)

나는 문을 열고 접시와 종이봉투를 받아서 들어가려다가 아저씨한테 무슨 용기였는지,

-저기.. 토끼들 만져볼 수 있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래도 된다고 허락하고는 토끼장 문을 열어주었다.


마당에 깔아놓은 돌 틈 사이로 삐져나온 민들레와 이름 모를 잡풀들을 열심히 코로 탐색하며 토끼들은 밖으로 나왔고 한 마리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감싸서 내게 건네주었다. 토끼는 보드랍고 따뜻하고.. 조금은 축축했다.

-매일 일하고 하시면 안 피곤하세요? 토끼들을 어떻게 하다 기르게 되신 거예요?

-외로워서요. 그래서 한 마리 말고 두 마리 데려왔고요. (내게 존댓말을 쓰셨다. 매번)

-아.. 너무 귀여워요.

어색하게 몇 마디 나누고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고 외롭다는 그 말이 그때도 지금도 마음을 무겁게 한다.


토끼들아. 후에 알았지만 부모 없이 홀로 크고 또 고향 떠나 타지에서 혼자 일하며 힘들고 외로웠을 아저씨가 너희들에게 가끔 구박도 하고(밥 많이 먹는다고) 갖다 줘버릴 거라고 술주정도 했지만, 너희가 없었으면 몇 배는 더 쓸쓸하셨을 거야. 나도 미소와는 다른 (개) 습성과 모습의 너희를 지켜보면서 걱정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어. 가끔 뒷발차기로 토끼장을 치던 그 리듬에 웃기도 했었고. 고마웠어.

*글과 그림 제가 작업합니다. 집안 사정으로 하루 늦게 올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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