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나와 따뜻한 물 한 잔과 함께 베란다로 향했다. 전 주인이 마룻바닥으로 인테리어를 하고 간 덕분에 베란다는 나의 작은 요가원이 된다. 깔린 요가 메트 위에 앉아 목을 돌리고 나비모양으로 두 다리를 펄럭이며 스트레칭을 한다. 누군가는 걷기와 달리기를, 누군가는 기구를 이용해서 운동을 하지만 나에게 맞는 운동은 요가다. 근력이 없는 내가 무리하지 않으며 서서히 내 몸을 바라보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면에서 요가는 참 매력적인 운동인 것 같다.
처음부터 요가가 좋아진 것은 아니다.
20대와 30대에도 요가를 배웠던 적이 있으나, 한 달도 못 가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열정이 넘쳤던 20대를 돌이켜보면 그때의 요가는 ‘악쓰다 자포자기한 요가’였다. 숙련된 동작을 하며 곡선이 예쁜 다른 회원과 비교하며 나의 몸을 보니 형편이 없었다. ‘왜 나는 저런 몸매도 , 저런 동작들도 나오지 않는 거냐’며 자괴감에 빠져 굳은 하체를 풀기도 전에 그만두기 일쑤였다. 30대의 요가는 ‘반항의 요가’였다. 어느 정도 사회생활도 했고 나이도 들 만큼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요가를 배웠다. 연륜 있는 요가 선생님은 반듯한 몸매에 멋스러운 분이셨다. 카리스마와 열정이 넘치다 못해 초보 회원들의 수준보다 더 이상을 요구하시는 요가 선생님에게 서서히 불만이 쌓여갔다. 그 초보 회원 중 한 명은 당연 나다.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과 다른 행동으로 이상한 동작을 나무라며 바로 훅 치고 들어와 눌러버린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날 나는 또 요가를 그만뒀다. 선생님의 고압적인 가르침에 기가 꺾인 나는 안 되는 몸뚱이를 탓하며 ‘요가는 나랑 맞지 않다’며 핑계를 댔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요가를 마흔이 되자마자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약하게 태어난 몸도 이유였겠지만 분명 마흔이라는 숫자를 넘기고 난 이후의 몸이 예사롭지 않았다. 20,30대에 아픔은 감기, 두통, 위장병이었다면 마흔의 몸은 뼈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오래 앉아서, 너무 많이 걸어서의 근육통과는 다른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불편함이다. 친정 엄마가 일어날 때마다 “아구 구구구” 소리를 내는데 이제는 내가 절로 그런 소리를 내뱉고 있다.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마흔부터 관리를 잘해야 쉰이 편할 것 같은 불안감에 자발적으로 요가를 시작하게 되었다. 마흔의 요가는 ‘ 나다움을 위한 요가’다.
쉬었던 요가를 시작하는 날, 당연히 동작이 될 리가 없다. “근력이 없어서 끈기도 없다”는 선생님의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가끔씩 다리를 휙 젖히는 선생님의 태도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불쌍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사실, 아프니까 눈물이 나더라.) 몸매 좋은 중년 부인의 폴더 동작도 , 군살 없는 아가씨의 일자 하체 스트레칭도 전혀 부럽지가 않다. 희한하리만치 나는 평온하다. 비교를 버리고 불쌍한 내 몸에 귀 기울이며 오직 나만 보게 되었다. 나와 영원히 맞지 않을 것 같았던 요가가 점점 좋아졌다. 그렇다고 내 몸이 폴더처럼 접히고 몸매가 예뻐진 건 전혀 아니다. 여전히 하체 동작을 할 때면 당장 때려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속삭인다.” 살아온다고 굳은 내 허리야, 내 골반아, 내 근육들아. 수고 많았다. 고맙다. "
그 누구도 필요 없다.
오직 나 하나의 존재로 남아있다.
때로는 화가 나고 분노가 일어서 굳어진 어깨를 보며 ‘ 화가 많이 났구나’ 알아차리고 걱정이 많아 생긴 두통으로 목이 뻣뻣해진 날에는 ‘ 걱정을 담고 있구나’ 알아차리며 따뜻한 시선을 넣는다.
어제 아이에게 화를 냈다. 아침에 일어나 요가 매트로 가서 스트레칭을 하는데 뒷목이 뻣뻣하다. ‘아, 아이에게 화를 냈었지. 너무 피곤해서 화가 났구나. 오늘은 천천히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