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5일. 드디어 간다.
설레는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잠자리에 든 지 4시간 만에 눈이 번쩍 떠졌다. 부지런히 일어나 씻고 나갈 채비를 한다. 아직은 10월이지만 새벽 공기는 벌써부터 차다. 어차피 장거리 비행이라 화장은 하지 않는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나가야 하다 보니 전날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일어나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아빠가 현관으로 나온다.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줘?"
우리 집에서 지하철역까지는 도보 5분 정도의 거리인데 큰 캐리어와 함께 새벽 골목을 걸어 나가는 딸내미가 걱정되었는지 아빠가 묻는다.
30살이 훌쩍 넘은 딸자식도 이럴 땐 부모 시선엔 어린아이가 된다.
여기서 잠깐. 유럽 여행 소식을 전했을 때 기억에 남는 아빠의 반응을 공유해 본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영어 회화 공부를 해놨어야지.'
'말도 안 통하는데 여행을 어떻게 하려고?'
'경유를 한다고? 영어도 못하는데 공항에서 길 못 찾아서 국제 미아 되는 거 아니야?'
아빠.. 나 그 정도는 아니야... 그리고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여행은 눈치로 하는 거랬어..
나는 이 걱정 유전자가 참 무섭다.
다시 R과 나.
원래는 공항버스를 타고 편히 가려고 했는데 아직은 코로나로 인해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공항버스 운영이 재개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공항철도를 타면 50분이면 공항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냥 택시를 탈까 고민했던 우리는 대견하게도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부지런히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제1여객 터미널에 내려 카운터로 향한다.
'아 공항에 얼마 만에 온 거지? 공항 냄새(?), 공항 분위기 너무 좋잖아!'
코로나가 조금씩 잠잠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심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지 공항은 조금 한산하다.
카운터로 가는 길. 저울이 보여 캐리어를 올려본다. 조금만 더 욕심부렸다간.. 아찔하다.
저 멀리 우리 카운터가 보인다. 사람이 정말 별로 없다. 내가 생각한 카운터는 길게 늘어선 줄과 수없이 많은 카트들로 가득 차있는 건데. 확실히 여행 비수기이긴 한가보다. 개이득.
그런데 아무도 없다. 직원조차도 없다. 그리고 우리 눈에 들어온 카운터 위 화면에 띄어진 글.
부지런해도 너무 부지런한 우리였다. 한 시간 동안 우리 뭐 하지?
우선 비염 환자인 R과 나는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아 약국에서 사 온 약을 먹는다. 둘 다 며칠 전부터 주체할 수 없는 콧물과 재채기로 비교적 좋지 않은 컨디션이었기 때문에 단단히 대비한다. 그리고 우리는 잠깐 쉼의 시간을 갖는다.
잠을 몇 시간 못 잤는데도 피곤하지가 않다. 그저 설렘과 걱정뿐이다.
나는 어쩌면 지쳐버린 현생을 피해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가는 건 아닐까?
해결보단 회피를 선택한 건 아닐까?
이렇게 떠나버리는 여행에서도 나는 걱정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많은 걱정과 불안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리고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또 다른 걱정이 비집고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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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3n 년 인생 첫 장거리 비행인데, 흑해 한가운데에 이 비행기가 추락하진 않을까?
비상구 좌석에 앉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쩝. 웃기다 진짜.
상상 속 어떤 세상에서 놀다 오니(?) 어느덧 카운터 오픈 시간이 다가온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온다. 우리도 재빠르게 줄을 선다. 어느새 줄을 가득 채운 사람들. 부지런히 온 보람이 있네. 부디 우리의 가방들과 안전하게 프라하 공항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며 빠르게 짐을 부치고 그렇게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출국 절차를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