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의 감흥을 다시 떠올리고 싶어서,
나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어 들었다.
책의 전반부에서 나는 헤르만 헤세의 섬세한
인물 묘사에 압도적으로 빨려 들어갔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나를 부여잡고 책을 읽었어야 했는데,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겠다며
그의 글을 빨아들이기 바빴다.
그저 '완전한 몰입'으로 그의 글을 빨아들이고
나서야,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왜 결국 그는 자신의 '수레바퀴' 아래 깔렸는지.
작은 마을에서 눈에 띌 정도로 재능 있고,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촉망받는 아이 한스는
'햄릿'과 마찬가지로 유약하기 그지없는 성격이 점차
고착화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나는 그 이유가 단순히 타고난 성격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진정한 어른'의 부재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를 따스하게 품어 줄 어른이 될 수 있었던 '엄마'는
이미 여러 해 전에 죽었고,
아버지는 자식의 내면적 성장을 돕기에는
대단히 역부족인 사람이었으며,
한스 주변의 교장과 교사, 그리고 목사는 오직
자신의 도움으로 성장하는 한스를 지켜봄으로써
대리만족을 얻는 '충실한 교육자'에 불과했다.
그나마 구둣방 아저씨 '플라이크'만이 유일하게
한스의 '인간적인 성숙과 성장'에 관심을 가지는 듯
보였지만, 그가 던지는 목사에 대한 충고는
'회의적인 시선'에 불과함으로 어쩌면 어린 한스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어쩄든 그는 한스의 죽음 앞에서 마지막에
그를 제대로 돌보지 못함에 대한 일말의
죄의식을 비추는 유일한 어른이긴 하였다.
어른이 아니라면, '친구'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 또한 애매했고, 불완전했고, 짧게 끝나 버렸다.
한스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가 마을 대표로 유일하게
시험에 나가 2등으로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나도 또한 감정이 벅차올랐다.
결과가 나오기 직전까지 한스가 느꼈던 그 초조함과
세상이 무너질 듯한 절망감에 대해 묘사할 때,
나는 같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만약 한스 곁에 있었더라면,
한스의 '엄마'였더라면.
아니, 구둣방 아저씨의 아내로 또한
한스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더라면.
'숙모'였더라면.
소설 속에 등장할 수 있는 여자란 여자는 모두
끌어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 기특하고,
그저 존재함으로 충분히 목적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일 수 있었을까.
씁쓸하기 그지없는 한스의 마지막을 보며,
나는 분노하였고
그래서 또 나는 어떻게 나의 수레바퀴를 굴릴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데,
'운명의 수레바퀴'에 내가 올라타는 것인지.
아니면 그 수레바퀴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굴릴 것인지.
'살면 살아진다'는 어른들의 그 말씀을
나는 아직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이 또한 나의 유별난 성격적 특성도 어쩌면
한몫할 수도 있어서
그저 '한스'가 유약하기 짝이 없는 성격이라 탓할 수도
없고, 또한 그를 붙잡아 줄 그런 '어른'이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도 없어서 뭐라 탓하기도 애매한
입장에 놓여서 결국 나는 난처해졌다.
책을 빨아들였더니, 나를 빨아들였고,
결국 또 '퉤'하고 뱉게 되는 것들과
'꿀꺽'하고 삼키게 되는 것들이 있어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용기 내어
한 번 '내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려 보자며
간신히 나는 다독이는 수순에 이르긴 했는데,
이따금씩 보이는 나약한 내 모습이
알고 보니 또한 '한스'의 모습 속에 투영되기도
한 것 같아서 정신이 번쩍 들었기에,
나는 이번에도 나를 잘 빨아들인건가
애매한 착각 속에 빠져 잠시 독서의 여정을 마무리한다.